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베로니카와 죽음 옆에서.
자신의 스크립트에 존재하지 않던 상상을 시작하게 된 순간들은 우연 아니면 운명이다.
간단한 답과 어려운 질문이 있고, 가벼운 죽음과 무거운 삶이 있다고 했다. ‘평범한’이 앞에 붙는 것, 그런 삶 같은 건 애초에 없다는 거 알면서도 따라가게 되는 게 사람일까.
사랑도 성취도 문화적으로 코드화될 수 있고, 사회적인 패러다임으로 진화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받은 각자의 개인들에게 서로는 어떤 의미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결정론에 따라 움직인다면 범죄자를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알려진다. 사회나 법적인 제도 마련이 영향을 주는 긍정적 효과는 매우 자명하고,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데 꼭 필요하지만, 우연이나 운명 앞에 이들이 무력해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왜일까.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기능과 쓸모만을 키워나가고 싶지 않다. 앞에 놓인 여러 기준을 만드는 건 누구이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독한 질문을 던지며 어설픈 교양과 논리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어 보일 때도 있다.
젊은 육과 영은 그들조차 통제 못할 에너지에 이끌려간다. 그렇게 직접 부딪히고 상처받으며 성장한다. 응당 직접 경험해 본 만큼, 자신의 것이 생긴다.
하지만 젊음은 누군가에겐 수단이다. 잃어버린 무엇일 수도 있다. 노화가 질병이라고 부추기는 사회엔 젊음만 찬미하는 진짜 환자들이 있고, 그걸로 돈 벌어먹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바보는 나이가 들어 늙은 바보가 될 뿐이다.
갈등과 혐오로 장사하는 괴물이 너무 많은 사회에선 천사도 날개를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