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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 Jun 15. 2019

열아홉, 그해 겨울

효진이가 수정이에 대해서 모든 것을 폭로했다.

주변 친구들을 험담하고 다녔다는 것, 그중에서 에 대해서 제일 많이 험담하고 다녔다는 걸 말이다. 특히 우리 집안에 대한 얘기, 집안 형편에 대한 얘기, 장롱 안에 컴퓨터가 들어 있다는 얘기, 그냥 나에 대한 모든 것을 험담했단다. 나의 배신감은 말도 못 했다. 민정와 효진이와 수정이 중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건, 많이 의지했던 건 수정이었기 때문이다. 수정이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학교 분위기는 조금 뒤집어진 상태였다. 대부분은 수정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요상한 분위기가 학교를 맴돌자 냉소적이었던 수정이의 담임 선생님이 싱글싱글 웃으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우리는 모두, 어른은 우리들 일에 상관 마시죠, 라는 분위기로 대답을 피했던 것 같다. 그 일은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마지막 CA 활동을 남겨두고 나는 몹시 걱정했고 고민했다. 내가 활동한 CA 부는 종이로 브로치를 만들거나 미리 다듬어진 나무에 반짝이 장식을 하는, 조금 따분한 부였는데 그 부에 아는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었고, 아는 이라고는 얼마 전의 사건으로 절교해 버린 수정이만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 친구도 없는 부에서 홀로 종이와 반짝이를 조물거릴 정도로 배짱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CA 활동을 가지 않기로 작정했고, 정말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어떤 의미로는 악명이 자자했던 학교였기에, 조퇴와 결석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그런 걸 하게 되는 날에는 난리가 나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이런 것에 조금 겁을 먹은 상태였고, 선생님들은 뭐랄까,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사실은 어쨌든 학생이 빠짐없이 학교를 나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학생들을 위하는 길이라, 진정으로 학생을 아끼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엄하게 대했던 건 아닌지, 어느 것도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때의 나는 막상 학교를 빠지니 대재앙이 일어날까, 양심의 가책으로 안달이 났다. 그러나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


게다가 마침, 학기 중에 지방에서 서울로 완전히 이사를 가버려 내 집이랄 것이 없었다. 아빠는 먼저 서울로 올라가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셋째 큰아버지 댁에서 겨울방학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를 빠진 토요일. 갈 곳이 없어졌다. 친구들을 만나 놀고 싶었지만, 몇몇 친구들은 이미 취업을 했거나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학교를 빠졌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또 외톨이처럼 보내기는 싫어, 결국 엄마를 찾아갔다.


나는 어렸을 때 엄마랑 정말 친했다. 엄마니까 안 친하면 이상하려나. 어렸을 때 친구처럼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혼 후 따로 떨어져 살게 되니, 엄마에게조차 낯을 가리게 됐다.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어색했다. 꼭 다른 사람과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엄마를 찾아간 건…….

마침 엄마는 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집에는 똘이라는 시츄 강아지도 있었다. 운동을 너무 안 해서 그런지 몸이 뚱뚱했는데 이상하게 근육이 붙은 듯 딴딴하기도 했다. 나는 똘이도 어색했다. 똘이는 눈곱도 안 껴있었고, 미용도 예쁘게 되어 있었다. 강아지답게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는 조금 안심했다. 만약 집안도 엉망이고, 똘이에게서 냄새가 났다면, 나는 엄청 불안했을 거다.

멀쩡했던 생활이 변해 버렸다. 사람은 절망에 빠지면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돌보느라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하게 된다. 그게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 느낀다. 그래서 아마 엄마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깔끔한 똘이를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모두 부지런하고 집 안 청소도 잘해서 주변이 늘 깔끔했다. 나만 게을러서 집 안 청소도 잘 안 하고 빨래도 한 번에 몰아서 하곤 했다. 그때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 극복하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밥 먹을래? 제육볶음 해 줄까?」

「응.」

「나중에 집에 가면 해서 먹어. 그냥 고기 사서, 제육볶음 양념 넣어가지고 만들면 간단하니까.」

엄마가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하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정말 요리를 잘했다.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엄마의 요리는 제육볶음, 물김치, 총각김치, 꽃게탕이었다. 떡볶이는 좀 못했다. 그런 맛있는 요리들을 먹어 본 지가 오래됐다. 아빠와 함께 둘이서 살게 된 이후로는 오징어 젓갈, 오징어 볶음, 사골국, 오뚜기 3분 카레다. 아빠는 인기쟁이라 아는 분이 밑반찬을 해다 주기도 했는데, 쌍꺼풀 수술 부작용으로 한쪽 눈이 감기지 않는 아줌마댁 오이지가 정말 맛있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제육볶음이랑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을 먹었다. 맛은 어딘지 달라진 것 같기도 했지만, 나는 모처럼이니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의 시간을 늘쩡늘쩡 보내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아파서 못 갔다고 꾀병으로 둘러댔다.

저녁에는 엄마를 따라 엄마 가게로 갔다. 엄마는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픈 준비를 하는 엄마에게 고등학교 졸업하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러고 있는데 손님들이 들어왔다. 왁자지껄 중년 아저씨 세 명이 내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고 마른안주와 맥주를 시켰다. 엄마는 그것을 갖다 주고 나에게 왔다. 용돈을 쥐여 주며 다음에 또 오라고, 연락하겠다고.

바깥으로 나왔다. 엄마에게 받은 용돈이 기쁘기도 했지만 어색했다.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큰돈을 준 적이 없는데. 또다시 혼자가 됐다. 초겨울의 저녁 바람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와 모두의 기분이 술렁이는 이때 홀로 적적함을 느낀다. 적적함을 느끼는 열아홉 살은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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