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작가의 나른한 일상
9년 동안 동거 동락해 온 반려묘 첫째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노트북을 이고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해가 많이 길어진 걸 체감한다. 잠깐 샛길로 빠질까? 하는 유혹이 생겼지만, 고양이 얼굴이 아른거려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내 발소리를 들은 둘째가 마중을 나와 있었고, 첫째는 자는 중이었는지 이불 안에서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다. 잘 있었어? 고양이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또 구토를 한 건 아닌지 흔적을 찾아 나섰지만 없었다. 다행이었다. 첫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나는 휴일 맞이 집안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런 날 미리미리 집안일을 끝내 놓으면, 휴일에 손가락 까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모처럼 부지런을 떤다.
쌓아뒀던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놓고 세탁을 하는 동안 밑반찬을 좀 만들어 놓기로 했다. 매콤 감자조림을 만들기 위해 감자칼로 감자를 깎는데, 문득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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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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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시다. 우리 집 싱크대 맞은편은 그냥 벽이지만, 순간 상상을 했다. 내 맞은편에 작은 창문이 있고, 이 창문 바깥으로 무성한 잡초들과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은 덩굴 식물이 가득한 정원이 보인다면 참 좋겠네. 하고 말이다. <무화과 숲> 시의 해설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잠시 떠올렸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인의 외로운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도 한다.
아마 나도 감자를 깎다가 잠시 누군가를 생각한 저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인만큼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왜인지 내일이 기다려졌다. 왜 내일을 기다리는지 그건 수수께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