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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Feb 19. 2022

익숙해지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네요

스물다섯 번째 기록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익숙하게 휴대전화를 들어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버스가 도착하면 익숙한 듯 올라타 카드를 찍고는 남은 자리 중 가장 익숙한 자리에 몸을 앉힌다. 몇 년째 보는 버스의 바깥 풍경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기에 고개를 푹 숙인 채 휴대전화만 본다. 그러다 익숙한 우리 동네에 들어오면 하차벨을 누르고는 정류장 직전 빨간불에서 일어나 미리 카드를 찍고, 정차한 버스의 문이 열리자 익숙한 정류장의 풍경이 눈앞에 보인다.


언제부터 혼자서 버스를 타는 일이 이리 익숙해졌을까. 어릴 적엔 누르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보이던 하차벨이 어느새 하고많은 버튼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걸까. 북적이는 버스 안에서 "내릴게요" 말 한마디 내뱉는 게 무서워 한두 정거장을 지나친 후에야 겨우 버스에서 내리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무심한 말투로 "잠시만요"를 외치는 어른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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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시간이 답이었다. 대중교통을 익숙하게 이용하게 된 것도,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있게 된 것도 말이다. 두렵기만 했던 첫 도전이 이제는 몇 번째인지 알 수조차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건 분명 시간이 흐른 흔적일 테다.


익숙함을 느끼는 내 모습이 나름 멋지다고 생각했다. 학생 때부터 꿈꾸던 도심 속 사회인이 된 것 같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져본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내가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시간만큼 주변 또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흐르는 시간에 대한 공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라.


버스가 무서웠던 어린 시절부터 버스 타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변은 참 많이도 변해왔다. 평생 갈 줄 알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얼굴 한번 보기 힘들어졌고, 단골이었던 가게 몇 곳은 문을 닫았으며, 신축 아파트였던 우리 집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 달에 한 번 보수를 해야 하는 헌 집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제자리를 지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허무함이 밀려왔다. 허무하다 못해 공포를 느꼈던 건 우리 할머니가 어느새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계신다는 걸 느꼈을 때였다.


할머니가 눈물이 다 나네...


손녀에게 목도리를 선물로 받으신 할머니의 반응이었다. 그저 목도리가 예뻐 보이길래 사다가 드린 건데,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좋아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신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으니, 말은 못 하셨어도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구나 싶었다. 할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서 울던 어린 나를 괜찮다며 달래주셨던 할머니를 이제는 내가 위로해 드리려니 썩 어색했다. 언제까지나 사랑을 받고 자랄 줄만 알았는데 이제 받은 만큼 돌려드려야 할 때라는 것을 처음 느껴서였을까.


작년 여름, 할머니의 백신 접종 날짜에 맞추어 우리 집 대표로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접종 당일에 할머니 혼자 계시는 게 아무래도 엄마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 대신 서류를 작성하고 길을 안내해 드렸다. 지하 공간이 무섭다며 지하층에 있는 동안 내 손을 꼭 붙드신 할머니의 모습이 그때는 왜 그렇게 연약해 보였을까. 할머니 댁을 떠나는 다음날까지 할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내가 의지했던 누군가에게 이제는 내가 의지할 곳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건 흐르는 시간 때문이지 않을까. 내가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시간만큼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던 어른들의 시간도 흘렀을 테다. 그러니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게 이제는 썩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요즘 들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자꾸만 스마트폰 사용법을 물어보신다. 카카오톡 이름란에 상태 메시지를 써놓으시기도 하고, 보이스피싱 문자를 보여주시며 "이거 진짜야?"라고 여쭤보시기도 한다. 팔팔한 20대인 내 입장에서는 설명을 이해 못 하는 두 분이 가끔 답답할 때도 있지만 별 수 있겠나. 그래도 오늘이 앞으로 남은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니까. 나의 어른들은 부디 천천히 늙어가셨으면 좋겠다. 내가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려도 괜찮으니까 말이다.


출처 네이버웹툰 독립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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