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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Sep 15. 2022

익숙해지는 데 한 세월

Jetzt bin ich fertig!

적응이 느린 편이다. 유년 시절 숙제를 하는 나를 보시던 엄마가 하다못해 "어떻게 한 문제를 푸는 데 한 세월이 걸리니?"라며 당신 가슴을 치셨을 정도로 말이다. 충분한 시간과 보는 자의 깊은 인내심 아래서는 곧잘 적응하지만 누군가의 닦달이 끼어든다면 적응은커녕 외려 주눅 들어 포기하기도 일쑤였다. 이리 나릿하고 소담한 사람이 생판 초면인 나라에 적응하여 평정심을 되찾을 때까지 걸린 시간. 무려 여섯 달이다.


며칠 전 장학금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워드를 켰다. 공허하고도 광활한 공백을 응시하며 지난 6개월을 회상했다. 잔뜩 겁먹었던 입국심사, 잠 못 이루던 기숙사에서의 첫날밤, 까무러치게 다양했던 인종과 국가, 답답했던 행정처리, 그럼에도 재밌었던 여행들과 과분할 정도로 좋은 친구들.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칠 때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말하곤 하지만 이번만큼은 길고도 또 길었던 시간이었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라 새로웠고, 새로워서 두려웠던 나날의 연속이었으니.


요즘은 산책을 한다. 홀로 기숙사 반경 1km를 벗어나는 것조차 두려워 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혼자서도 씩씩하게 이곳저곳을 모험하며 다닌다.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혹여 인사를 건네지 않더라도 외국인이니 이해해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심히 그들을 지나치곤 한다.


노을 진 하늘은 어느 곳에서나 잘 어우러진다


장을 보러 다니는 게 낙이 됐다. 코앞에도 마트가 있지만, 즐겨 먹는 사과가 떨어지면 30분 거리에 있는 마트를 다녀온다. 샴푸가 떨어지면 이번에는 어떤 향을 써볼까- 매대 앞에서 한참을 구경하고. 시리얼이 떨어지면 저번에 친구에게 추천받았던 걸 먹어봐야지- 괜히 설레고. 여러 가지 요거트를 시도해보다가도 결국에는 딸기맛으로 돌아가는 류의 일을 반복한다. 어디 홀린 사람마냥 빨간 가격표를 찾아다니는 건 덤.


밤에는 주린 배를 달래며 요리 동영상을 찾아보곤 한다. 어쩌다 남은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찾게 되면 내일은 이걸 만들어 봐야지- 하며 재생목록에 담아둔다. 가끔은 먹방으로 길을 잘못 드는 탓에 요동치는 식욕을 잠재우는 데 꽤나 애를 쓰곤 한다. 그렇게 겨우 잠에 들면 가벼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데, 이때의 산뜻함은 마치 향수처럼 하루의 시작에 행복을 입혀주는 느낌이다.


외국 친구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려 하면 살짝 아득해지지만 말이다. 나를 대하는 그들의 말투와 행동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재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그게 어쨌건 내가 친절한 사람이면 된 거라고, 로알드 달이 자주 했던 말이란다.


최근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날 깨우쳤다


드디어 익숙해진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이제 나의 일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여유를 갈망해왔던가. 버텨준 나에게 고맙고, 의지했던 친구들에게 고맙고, 먼 곳에서 걱정했을 가족에게 고맙다. 앞으로의 1년도 능력껏 잘 버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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