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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글쓸러 Dec 13. 2023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

 

 오늘도 잤다. 계속 잤다. 누워서 눈을 떴다가도 감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어차피 사람도 못 만나고, 밖에 나가도 코로나19 때문에 난리인데, 자는 거 말고 뭘 더 하겠나?     

 주말에는 끊임없이 수면에 빠져있다가도, 평일에는 근무해야 하니깐 어떻게든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스크를 쓰고 보건지소로 내려간다. 일한다. 환자들을 만나서 필요한 거 파악하고 처방하고. 그러다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점심은 간단하다. 마스크 쓰고 직원들과 같이 식당에 가거나, 혼자 먹거나, 둘 중 하나다. 오후 진료도 마스크는 필수다. 지소에서 진료한다. 하루 종일 마스크뿐이다. 정말 지겹다. 6시에 근무 끝나면 보건지소 바로 뒤 학교 운동장으로 향한다. 혼자서 쓸 수 있는 그 공간을 뛰고 또 뛴다. 그나마 땀을 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다. 그 이후에는 뭐 특별할 건 없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독서하거나. 단조롭기 그지없는 일상이다. 코로나19 덕분에.     

 사실상, 보건지소에서 근무하면서 만나는 환자나 직원들 말고는 사람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점심, 저녁은 먹긴 해야 하니깐 어쩔 수 없고. 헬스장 가고 싶은데, 걱정되는 마음에 혼자서 운동하고. 그 이외 굳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활동 위주로 했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이런 게 전부였던 삶이다. 코로나19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 말이다. 나름 건강하고 건전 그 자체의 일상이었다. 며칠 정도는 괜찮을지 모르나, 이렇게 몇 달을 보내니 지루하다. 그러다가 잠에 취하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의욕이 떨어졌다고나 할까?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 부여잡고 웹툰, SNS, 웹소설을 보는 게 전부였다. 네이버 쿠키는 상위 3% 달성할 정도로 구웠고, 웹소설은 1년 동안 5,000편 가까이 봤다. 내가 봐도 나 자신이 참 독하긴 하다.      

 그렇게 방 안에서 사는 게 익숙해졌다. 이 안에서 해결하는 게 다 가능해졌다. 가끔 힘들면 운동장 가서 뛰면 되었고. 친구들이나 가족이 그리우면 전화하면 되었고. 방에 틀어박혀 보내던 일상들이 진부해졌다.      


 여행도 가고 싶었다. 좀 더 자유롭게 살고자 여권도 미리 만들었는데, 단 한 번도 쓰지 못했다. 5년 만료의 여권을 깨끗하게 마무리할 예정으로 보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유리 케이스에라도 담아서 박물관의 유명 유물들처럼 소중하게 보관할까?  

    

 하여튼,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어쩌다가 내 삶이 이렇게 단조롭게 되었단 말인가? 코로나19가 끝났음에도, 이런 일상이 비슷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런 내용들에 대해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에서 말하는 바들이 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43118006619?cat_id=50005782&frm=PBOKPRO&query=%EC%9A%B0%EB%A6%AC+%EC%9D%B8%EC%83%9D%EC%97%90+%EB%B0%94%EB%9E%8C%EC%9D%84&NaPm=ct%3Dlpq8nr00%7Cci%3D990813515cae9f6c1c2f36dc9a30b6b63ad771b5%7Ctr%3Dboknx%7Csn%3D95694%7Chk%3D37eca13a4fddde5a5e4a549a1ccb8f0c6f1ba9df     



 우리는 이 작은 상자에 모든 것을 기대한다. 진짜 삶을 포기한 채 우리의 의욕과 열정을 어긋나게 몰아가는 도구에 의지하는 셈이다. 스마트폰은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아야 하건만, 우리는 그 기계에 휘둘린다.     

 스마트폰이라는 보조장치를 갖게 된 신인류는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사랑을 나누다가도, 전쟁 중에 긴급한 전갈을 받은 지휘관처럼 냅다 그 장치를 꺼내든다. 전화, 메시지, 알림을 우연히라고 놓칠 수 있겠는가? 이게 바로 포모(FOMO, Fear Of Missing Out), 즉 뭔가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최근의 상황과 청원에 열광한다. 밀려드는 소식들,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정보가 불확실한 파트너보다 우리를 더욱 흥분시킨다.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57-65쪽     

 세상을 회피하는 것과 세상에 괄호를 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바깥세상을 저버리기 위함이 아니요, 다시 돌아가기 위해 그 세상을 잠시 유예 상태에 두는 것이다. 집이 감방이 되어버리면 현실에 열정을 쏟을 신체는 점점 죽어간다. 그런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요, 일종의 방공호이 요새화된 수용소일 뿐이다.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106-109쪽     

 휴식의 공간인 침대에서 우리는 항상 수면 부족과 수면 과다 사이를 오간다. 나이가 들수록 잠을 푹 자지 못 하는 것이 일상이 되니 적응을 하는 편이 좋다. 극단적 불면증에 시달리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에 빠지지 못하는데, 공황과 회복이 겹쳐 있는 상태이다. 기를 쓰고 잠을 자려고 할 때는 도통 잠이 오지 않는데,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때는 눈이 감기니 얼마나 허탈한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면 밤이 무자비한 선고 같다. 별것 아닌 걱정이 터무니없이 불어나고 오만 가지 음침한 근심 걱정이 짓눌려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누워 있는 인간은 무방비 상태이다. 밤은 무섭고 두려운 힘에 우리를 내어준다. 잘 때는 몸에 이것저것 걸치지 않기 때문에 침대에 있을 때는 급습에 더욱 취약한 상태가 된다. 때로는 곤경이라는 이름의 침대에 못 박혀 누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127-132쪽     

 이제 미리 정해진 삶의 방향은 없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그러므로 삶은 즉흥이 될 수도 있고, 반복이 될 수도 있으며, 밑도 끝도 없는 염불로 제한될 수도 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진부함이라는 시대병이 탄생한다. 진부함은 마치 흠집난 디스크처럼 끝까지 돌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튄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현명함이 아니라 가벼운 광기요, 영적인 치료제가 아니라 짜릿한 도취다. 봉쇄 경험은 바로 이 점을 두드러지게 했다. 봉쇄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막연히 불안하고도 피곤한 단조로움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었다.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과 반복에 근거한 단조로운 실행이라고 폴 발레리가 말했다. 하지만 반복은 우리의 기운을 분산시키고 약화한다. 반복은 오히려 무질서를 심화시킨다.

 시간을 늦추고 싶어 하든 앞당기고 싶어 하든, 위험에 노출되기를 각오하든 보호받기를 원하든, 마음속의 엄청난 충격이든 다행스러운 감정이든, 살다 보면 뭐라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변화의 여파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먼저 비슷비슷한 나날의 비몽사몽에서 깨어나 새로운 계시를 받아야 한다. 웅크리고만 있는 삶으로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71-81쪽     

 집이라는 공간이 한없이 확장된 만큼 공적 장소는 위축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 야망, 이동을 제한해야만 하리라. 미래의 인간은 증강된 현실에 보조를 맞추어 쪼그라든 인간일지도 모른다.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를 줄이는 일이 된다.

 현재 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을 겪고 있다. 지식과 기술은 아무 제한이 없는 것 같은데 당장 문턱 밖이 우리의 한계다. 그러나 안의 세상이라고 해서 어찌 위험이 없을까. 이 세상은 우리를 고독, 진부함, 가차 없는 권태, 존재의 피로, 영혼의 부유 상태로 이끈다.

 이제 집에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핵심은 “거의”에 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중요한 건 다 있다는 건가?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48-53쪽     


 이 책을 접하며 코로나19 때, 그리고 현재 내 삶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스마트폰에 빠져서 도파민만 엄청나게 분비하는 나날을 보냈다. 손에 잡히는 작은 도구에 의지하여 휘둘리는 삶을 말이다. 지금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만.      


 잠도 그렇다. 효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게 옳은 것일까? 가끔 힘들어서 계속 누워있을 때마다 이게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면서도 누워있지만.      


 일상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책에 나온 것처럼 진부하게 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새는 어떻게든 헬스장을 가고자 노력 중이다. 계속 카페를 가거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등 어떻게든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나의 삶을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바꿔보고자 한다.      


 여행 또한 다를 바 없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꽤 늘었지만, 여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역시 수없이 많다. 식견이 넓어지고 새로운 걸 보면서 달라질 기회를 얻고자 나는 떠난다.      


 코로나19 덕분에 4차 산업혁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다가왔다. 로봇 기술, 드론, 자율주행차, 가상현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그 모든 것들이 비대면으로 살아야 했던 전염병의 시대 때문에 초고속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과는 다르게, 우리의 삶 자체는 퇴보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 코로나19로 빗장을 걸어 잠근 것 같은 우리의 일상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금지는 그들을 속박했지만 금지의 종식은 그들을 난처하게 했다. 봉쇄령이 떨어졌을 때는 진심으로 저주했던 그 악몽 같은 감금 생활을 이제 그들은 아쉬워하지 않을까? 강제 봉쇄보다 더욱 우려해야 하는 건 위험한 세상에 맞선 자발적 자기 봉쇄이다. 스스로 선택한 독방에는 벽도, 족쇄도, 경비원도 없다. 간수는 우리 머릿속에 있다.    

 야간 통행금지, 입을 가리는 마스크, 제한된 행동들, 거리 두기는 우리를 구속했지만 떠받쳐주기도 했을 것이다. 팬데믹은 근심을 낳았지만 한층 더 큰 근심, 즉 자유에 대한 근심에서는 해방시켜주었다. 이제 가까운 미래에 자유는 씁쓸하게도 추억 혹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기분이란 “말세를 사는 기분”과도 같다. 군사 갈등에서부터 자연재해까지, 모든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는 여행을 미루고 자기 동네를 떠나지 말라고 한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공포와 칩거뿐이다.      

 우리는 한동안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공포를 겪었다. 무섭기도 했고 무기력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손을 잘 씻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도 틀림없이 엄청난 발견이지만 손 씻기가 가슴 뛰는 운명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면] 24-35쪽    

 

 결국 스스로가 눈앞에 보이는 빗장을 풀고 벗어나야 한다. 코로나로 방에서의 삶을 추구하다 보니, 나는 20kg가량 불었다. 그걸 빼기 위해 노력해서 지금은 달라졌지만, 가끔은 관성에 의해 돌아가고자 한다. 살 뿐만 아니라, 코로나 이전의 삶 그 자체로 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다. 잃은 것을 되찾고자 한다면, 이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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