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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글쓸러 Dec 27. 2023

우리의 관계는 물리학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28일 유럽 도피기 2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당시, 동기가 무려 120명이었다. 와. 다 같이 친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120명 모두와 어떻게 친밀하게 지내겠는가? 이런 일도 있었다. 4학년 실습 때 같은 조로 배정되었던 동기가 있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했던 이였다. “안녕하세요.”, “밥은 드셨어요?”, “오늘 과제는 해오셨어요?” 4년 동안 얼굴은 알았으나, 대화를 많이 해보지 않은 탓에, 존댓말로 서로를 대했다. 120명의 위력이란 그런 거였다.     


 본과 4학년 때, 프랑스로 교환학생으로 갔던 당시, 나 홀로 간 게 아니다. 나 포함 총 6명의 사람이 프랑스로 향했는데, 위의 이야기와 좀 비슷한 상황이었다. 존댓말로 대화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울리는 무리가 달랐던 탓에, 좀 어색한 사이였다고나 할까?      


 오래 전, SBS 예능 [룸메이트]이라고 있었다. 연예인들끼리 같은 숙소에서 지내면서, 생기는 일들을 보여주는 예능이었는데, 우리가 딱 그랬다. 프랑스에서 한 달 동안 말이다. 리얼리티 그 자체였다. 남자들은 거실을 썼고, 여자들은 방 2개를 각각 2명씩 사용하며, 우리는 진짜로 룸메이트가 되었다.      


 어색한 사이도 30일의 시간 동안 같은 숙소를 쓰다 보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더라.    

  

 병원 실습 가기 전날, 우리끼리의 소소한 축하 파티를 열기도 했다. 연어에 파스타, 와인을 곁들인 행복한 시간을 말이다.     

    


 병원 안에서도 각자 실습하던 곳이 달랐지만, 시간이 될 땐 같이 점심을 먹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와인 가격이다. 엄청 좋은 와인이 아니면, 거의 소주 가격이었다. 덕분에 매일매일 와인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과자, 연어, 고기, 빵, 파스타 등 가리지 않고 안주로 삼아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어느새 1병을 비운다. 아쉬운 마음에 빠르게 뛰어나가 또 다른 한 병을 구매해 오고, 같이 사는 이들과 나눠 먹게 되더라. 그러다 보면 동기들도 와인을 사 오게 되면서 파티가 열린다. 내가 와인을 먼저 먹든, 동기들이 와인을 먼저 마시든, 그날은 조용히 넘어가겠지 하던 날에도 결국엔 기 -> 승 -> 전 -> 파티가 되었다.    

 


 “오늘을 위해 와인을 사 왔어!”

 “어? 나도 사 왔는데?”

 “너두?”

 “나두!”     


 진짜로 그렇다. 누군가 한 명이 와인을 마시면, 끝내 모두가 다 같이 와인을 즐기는 마법이 절로 펼쳐졌다. 결국은 1인당 1 와인과 함께, 라면으로 자리를 마무리하던 게 국룰이었다.       



 당일치기로 벨기에 여행을 가고자 했던 때였다. 버스를 예약하려고 하는데, 같이 거실을 공유하던 형과 나의 카드 둘 다 인식조차 되지 않아 버스 예약이 불가능했다. 휴일이니깐 그냥 쉬어야겠다고 여기던 찰나, 다른 여 룸메이트들이 말하더라. “그냥 같이 가자!” 우리의 버스표를 끊어주면서 말이다. 솔직히 반할 뻔했다. 진짜 멋진 사람들.     


 누텔라 초콜릿의 와플은 벨기에 브뤼셀 첫 번째 일정이었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와플보다도 달았다. 당도가 100배 이상은 높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2개 정도 더 먹었으면 당뇨병 걸릴 거 같은 느낌이랄까.      



 오줌싸개 소년과 소녀를 직접 보게 되었다. 엄청나게 작던 조각상을 수많은 인파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에 휘말렸고, 결국 나도 사진을 찍고 말았다. 유행은 따라가야지!     


 초콜릿 박물관 투어도 색달랐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떠오르더라. 직접 만드는 것도 볼 수 있는데, 무제한으로 초콜릿까지 제공이 된다니! 벨기에는 당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더라. 그만큼 감동적인 맛이었다. 자꾸 입 안으로 초콜릿을 욱여넣던 내가 무서울 정도이기도 했고. 그동안 먹었던 초콜릿은 초콜릿이 아니었다. 여기의 초콜릿이야말로 찐이다!      



 브뤼셀 하면 홍합이라고 한다. 그렇게 여 룸메이트들에게 끌려서 간 곳은 [셰즈 레옹]이다. 치즈그라탕, 홍합탕, 고르케, 스파세티, 그리고 맥주. 술은 늘 빠질 수가 없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모든 메뉴에서 홍합 그 자체가 잘 녹아들었다. 홍합의 향과 맛이 이렇게 잘 풍길 수가 있나? (물론 맥주는 아니다.) 청양고추를 넣어서 얼큰하게 먹는 한국식 홍합탕이 뇌리 깊게 박혀 있던 나의 뚝배기를 [셰즈 레옹]이 부숴버렸다. 이래서, 음식 역시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먹어봐야 하는구나!      

 

https://travel.naver.com/overseas/BEBRU694788/poi/summary     


 소화하려고 걷다가 맥주를 마시고,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하면서 감자튀김을 입안으로 쑤셔 넣던 내가 어느 순간부턴 두렵더라. 벨기에. 이곳은 먹거리의 나라입니까? 왜 이렇게 모든 게 맛나죠? 저를 배 터져 죽게 할 심상입니까?      



  이 모든 걸 동기들과 즐겼다. 먹고, 여유롭게 걷다가, 추억으로 사진도 남기면서, 대화 나누는 등으로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숙소에서  와인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알아갔고, 여행을 통해 좀 더 가까워졌다. 사람 사이란 어떻게 될지 늘 알 수 없는 법이니라.     


 그 당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때 사람이 싫어서 고독을 추구했다. 홀로 있는 게 익숙해지려고 할 무렵에 가게 된 게 유럽이었다. 그곳에서 혼자가 아닌 다수가 되었다. 그것도 한 달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렇게 또 다른 친밀한 관계를 만들었던 시간이 책 [관계의 물리학]을 읽으면서 떠오르더라.      



우주의 법칙에 따르자면, 진정한 관계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힘으로 서로의 확장을 돕는 일이다. 팽창의 본성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거리를 내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모든 관계는 팽창한다’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멀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깊어질수록 관계가 드넓어진다는 의미다.      

책 [관계의 물리학]     


 모든 관계를 칼같이 잘라낼 필요가 없다. 친했던 관계들이 소원해지기도 하고, 가깝지 않던 사람들이 친해지기도 하며, 멀었던 사람은 계속 멀어지고, 늘 꾸준했던 관계는 더욱 풍성해지기도 하는 등. 그 누구도 관계를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끌어당기면서 가까워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때론 밀어내면서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러다가 다시 끌어당겨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고.     


 거리를 두는 것과 거리를 주는 것은 다르다고 [관계의 물리학]에서 말한다. ‘두는 것’은 건 한계를 정한다. 하지만 ‘주는 것’은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를 주는 일이다. 거리를 ‘두는 것’과 ‘주는 것’. 어쩌면 나는 내 일생동안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거리를 둬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하지만 두는 게 아니라 주게 된다면, 서로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그만큼 너와 나의 관계의 너비와 둘레가 확장되며, 물리의 법칙에서 작용과 반작용처럼 그리움의 힘만큼 믿음 역시 커질 수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나는 거리를 ‘주는 것’으로 나와 사람들 간의 자유를 주기로 했다.    

    

책 [관계의 물리학]에서 말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최적의 거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당신과 내 안에 천국과 지옥이 있고, 서로에게 천국을 보여줄지 지옥을 보여줄지는 당신과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서로의 마음에서 마음에 가닿는 거리가 곧 천국까지의 거리란 걸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신이 봄날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이유는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를 재느라 때를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어떤 씨앗이라도 심으라는 뜻이다.     


 나는 모든 이들 간의 적당한 거리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정의하고자 아등바등하다가 지쳤던 거다. 그렇지만, 유럽에서 결론을 향한 친척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관계를 물리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 명확한 정의는 뭘까?      


답은 이거다.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게 아닌 주기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밀어내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재지 말고 지금 당장.     


단순명료한 이 내용들이 우리들 사이의 물리학이라는 걸 유럽에서 느끼고 왔다.     

물론, 느낀 것과 별개로 여전히 어려운 게 사람들 간의 관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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