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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프릴 Aug 25. 2020

스마일 커피와 스마일 에코백

한 달 전 아침이었다. 장롱 한편 보석함 속  아주 작은 다이아 목걸이를 꺼냈다. 작년에도 한동안 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이후 대강 넣어둔 모양인지 잔뜩 엉켜있었다. 엉킨 목걸이 위에 밀가루를 솔솔 뿌렸다. 살짝 비벼주니 꽁꽁 묶여있던 목걸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슬슬 풀렸다. 밀가루는 조심스럽게 털고 목에 걸었다. 어디선가 목걸이를 하면 1.2 배 화사해 보인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외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왠지 마음만은 그 정도 화사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 날이었던가 그다음 날이었던가. 한 순간에 사무실 모든 풍경이, 공기가 생경해졌다. 10년 간 앉아있던 내 자리가, 이 자리에 앉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인생의 중요한 이벤트를 겪으며 내 삶과 완전 하나였던  내 자리가 말할 수 없이 어색해졌다. 아직 점심시간이 시작되려면 30분이나 남았지만 무작정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사원증과 휴대폰뿐. 그냥 집에나 갔다 올까 싶어 지하철에 올라타 본다. 그런데 막상 지하철을 타니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게 매우 귀찮은 것. 점심을 먹어야 될 텐데 집에 먹을 게 있던가. 그때 충동적으로 어떤  역에서 내렸다. 역 근방에 서점과 카페가 있는 역이었다. 미리 계획이라도 해놨던 사람처럼 목적지로 걸어갔다. 한 건물 지하엔 서점이, 1층과 2층엔 카페가 있다. 서점으로 내려가니 입구에서는 마침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권을 골랐다. 베스트셀러 코너로 가서 끌리는 책 중 한 권을 더 집어 들었다. 평소엔 인터넷 서평을 검색한 뒤 엄청 고민하다가 당장 읽을 한 권만 사지만 이 날은 그러지 않는다. 계산을 위해 줄 서있는데 옆에 디즈니 볼펜들이 쌓여있었다. 대부분의 상점에서는 사람들이 부담스럽지 않을 가격대의, 이미 집에 많이 있지만 왠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을 계산대 앞에 낚시용으로 전시해놓는다. 평소의 나라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물건 사는 일을 경계하니까 눈길도 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미 사무실에서 나올 때부터 나는 완전히 궤도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다른 궤도에 올라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책 2권과 쓸모없고 예쁜 볼펜을 들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1층의 카페로 가서 샌드위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구석 자리, 시간은 12시 20분. 회사는 이제 막 점심시간이 시작되었을 터. 샌드위치를 먹으며, 목이 막힐 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쪼르륵 마시며,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은 디즈니 볼펜으로 밑줄을 쳤다. 사실 그 날 오전은 세상 잠보를 순식간에 불면증 환자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날이다. 전날 밤엔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정신은 명쾌했다.  해결 과정은 지난했으나 1년 간 엉켜있던 목걸이가  쓱 풀렸던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이제 나는 다시 머리만 대면 잠드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쳇바퀴 속 일상 속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런 시간까지 갑자기 왔다. 사실 평소에도 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야. 왜 생각도 못했을까? 책 속 글자가 춤추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후 1주일 간 점심시간 즈음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이 곳에 왔다. 이 자리에서,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너무 좋았다. 모든 사건은 결국 제법 쓸모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주 어느 날, 문득 다시 그 카페에 가볼까 고민했다. 주저한 이유는 그 날이야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지 이제는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는 않을 수도, 되려 심심할지도 몰라 등등의 생각이 뒤죽박죽 했던 탓이다. 어영부영 점심시간이 되어 고민은 접고 팀 사람들과 함께 회사 식당으로 내려갔다. 맛있게 먹고 나니 아직 12시 10분, 아니 밥을 왜 이렇게 빨리 먹었지?  왜인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지하철을 타러 갔다. 아무 역에서 내려 지하철과 연결된 백화점 건물 내 한적한 카페로 들어갔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충동적이 된 걸까.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다. 바로 옆 계산대에 에코백 12000원이라고 쓰여 있다. 커다란 스마일마크가 해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오늘의 디즈니 볼펜은 이 녀석이다. 다시금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는 기꺼이 철저한 경영학 이론에 따라 배치된 미끼를 문다.  가방을 한번 만져보았지만 에코백의 품질을 가늠해본다기보다는 그냥 신중을 기하는 척한 것이다. 가방까지 손에 얻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신나 죽겠는 그런 기분 말고 그냥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너무 편안해서 좋았다. 늘 잘 자서 좋았고 내가 언제든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았고 혹시  다시 목걸이가 엉키더라도 풀려면 엄두가 안 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게 될 것 같아서 좋았다. 인생을 성공하는 방법은 "자기답게" 사는 법을 제대로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라 했다. 잘 사는 방법을 하나 더 알게 된 것 같아 좋았다.


 에코백을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식당에서 바로 오느라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지만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고 있다. 아니다. 듣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즐겨 찾는 플레이리스트,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이 많지만 음악 소리가 적당히 큰 고로 주변의 이야기 소리는 음악에 묻히고 내 앞에는 스마일 컵과 스마일 쇼핑백이 있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스마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스마일 저 멀리 봐도 스마일 모든 곳이 스마일이다.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은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건강검진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회사로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역 밖으로 나오니 곧 남편이 왔다. 스마일 컵과 스마일 에코백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 나 에코백이 너무 예뻐서 샀어. 또 사셨군요. 어 기분이 좋아가지고. 우리 부인 참 재밌어. 암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잖아. 벌써 7년인데.   


에세이를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내 생각의 면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점이 내겐 늘 부담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좋은 에세이를 잘 쓰고 싶은데 내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쓰려면 결국 나라는 사람이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람마다 되고 싶은 바가 다를 텐데 나의 경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올바르고 열정적이었으면 좋겠고. 오래 볼수록 좋은 사람이었으면 더더욱 좋겠다. 타인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고 나서  어, 이 사람 나랑 생각이 좀 다르네 싶을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웃기고 왠지 별나면서 소소하게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내 글은 그런 글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에세이를 잘 쓰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던 일은 편안한 마음을 기르는 것,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라서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레몬 껍질 속 시큼한 냄새가  드러날까 싶어서 문자 그대로 글로 칼을 막 휘두를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에코백을 사들고 오는 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뭐라도 쓸 수 있겠다.  왠지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이제 오늘의 외출 끝. 이제 돌아가서 다시 새로운 업무랑 씨름해봐야지. 모르는 건 선배한테 물어봐야지. 간간히 저녁에 하마랑 놀거리 생각하고. 체력 비축해놨다가 퇴근 후 신나게 놀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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