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21)_『파도야 놀자』
『파도야 놀자』 (이수지 지음. 비룡소)는 글자 없는 그림책이다. 책을 펼치면, 가름선 왼쪽 면에는 흑백으로 그려진 여자 아이가, 오른쪽 면에는 파란색으로 칠한 파도가 보인다. 아이는 자기 자리에 서서 파도를 놀린다. 역시 자기 자리에서 철썩이는 파도. 아이는 조심스레 가운데 선을 넘어 파도 쪽으로 몸을 옮긴다. 파도가 있는 자리로 넘어간 아이는 파도와 논다. 웃는다. 파도도 웃는다. 그도 잠시. 큰 파도가 다가오자 아이는 원래 자기 자리로 후다닥 뛰어간다. 파도도 따라온다. 순간 아이의 옷은 파랗게 변하고, 아이가 있던 자리 모래 군데군데 파랑이 보인다. 파도와 아이가 섞이는 순간이다. 아이는 웃는다. 파도도 웃는다.
책 속 아이는 경계를 넘나들며 파도와 섞여 놀고 어우러졌지만, 어쩌면 우리는 영영 파도와 놀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겠다. 파도는 바로 내 옆에 있지만, 가름선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가름선을 사이로 두고 놀리고 욕한다. 손가락질하다가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올해 3월을 맞이하고 지나면서 주변 여기저기서 가름선을 발견한다. 내가 그은 건지 상대가 그은 건지 따져 묻는 건 의미가 없다. 그저 열심히 선을 긋는다. 정말 재미있는 현상은 그러면서 모두들 ‘소통’을 말하고 ‘통합’을 외친다는 거다. 세상에 이렇게 오래가는 유행어가 있을까 싶을 만큼.
그런데, 호남과 영남을 가르고,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20대와 50대를 가르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이 기준은 누가 세운 걸까? 원래부터 이렇게 큰 갈등이 있던 사람들일까? 아니면 누군가 자기 목적을 위해 그은 선에 우리가 나뉘어 들어가 버린 걸까?
『파도야 놀자』 속 아이는 가름선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펼쳐진 그림은 가운데 그어진 선 하나를 넘으면 될 일이지만, 그림책은 종이를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바로 넘어가지 못한다. 구부러져야 한다. 한 번 구부러져 가름면 사이로 들어갔다 나와야 비로소 그 선을 넘을 수 있다. 작가가 숨겨놓은 의도가 감탄을 자아내는 지점이다.
‘구부러져야 경계를 넘을 수 있다.’
내 몸을 구부리고, 내 생각을 구부려야 비로소 경계를 넘을 수 있다. 구부러져 들어가 상대의 눈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같이 놀 수 있다. 그래야 상대도 구부러져 내 자리로 넘어온다. 구부러진다는 것이 내 원형을 깨는 행위는 아니다. 다만 구부러진다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고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용기에 대한 증거이다.
아이는 아이 모습으로, 파도는 파도 모습으로 자기 원형을 지키면서 넘나들고 유연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고 결국 서로 스며든다. 섞이고 자유로워지고 다시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각자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간다.
내 주변에는 몇 개의 가름선이 있을까? 우선 몸부터 풀어볼까? 유연하게 구부러지려면 굳어진 관절과 굳어진 마음을 풀어내는 것부터 시작이니까 말이다.
*덧붙여. 2022년 3월. 이수지 작가가 한국 작가 최초로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면을 빌어 이수지 작가에게 인사를 한다. 같은 시대를 살게 되어서, 이리도 좋은 그림책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