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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립 Dec 26. 2020

지난해 겨울, 카페 추억하기

지금은 할 수 없는 평일 낮의 사치

 일상성을 견디는 체력이 약한 편이다. 다행히 지금의 회사는 휴가가 많은 편이어서, 연차를 다 쓰면 한달 반정도는 쉴 수가 있다. 그렇다고 휴가를 정말 다 쓰는 대한민국 직장은 없을 테지만, 나란 사람은 최대한 지르고 질러서 팔할은 써버리곤 한다. 평일에 휴가를 냈는데 여행계획이 없을 땐,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한산한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보면 지저분하게 뒤섞인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되는 기분이 든다.


 바이러스가 뒤바꾼 겨울 풍경이 생경해서 지난해 이맘 때 쓴 일기를 뒤적여 보았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일주일짜리 휴가를 썼다. 그때도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카페에서 평일 낮의 여유를 즐겼다. 그 때 끄적였던 것들을 모아 본다. 지금은 할 수 없는 평일 낮의 사치다.



한남동, 앤드커피랩

 한남동 앤드커피랩의 라떼홀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달지도 싱겁지도 않다. 첫 모금을 마셨을 때는 마치 "이럴 줄을 몰랐지?"하며 도도하게 돌아서는 느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래에 깔린 시원하고 진한 우유의 맛이 올라오며 단 맛이 나기 시작한다. 중간 쯤 부터는 도렐의 너티 클라우드를 마시는 듯 고소하고 달콤한 땅콩맛이 난다. 마지막에 남은 커피에서 나는 은은한 산미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라떼 한 잔을 마무리하기에 적당하다. 

  화요일 오후 세시의 한남동은 여유롭다. 하긴, 종로의 스타벅스도 이 시간엔 한적할 것이다. 30대를 일터에 빼앗긴 한남동을 채우는 건 20대다. 발목 위에서 끊어지는 팔랑거리는 바지와 어깨선이 축 쳐진 루즈핏 셔츠를 예쁘게 매치했다. 누가 가르쳐 주는지 다들 옷을 참 잘 입는다. 



성수동, 까페 성수

 열시 사십분쯤 도착했다. 첫 손님이었다. 직원은 이른 시간에 방문한 손님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곳이 일상을 소비하는 일터이고 점심 시간을 전후로 매일 몰려드는 손님들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만도 했다. 가장 인기있다는 밀크티를 주문했다. 볼이 넓은 잔에 가득 담긴 밀크티 위에는 촘촘히 묶어낸 우유거품이 가득했다. 하얀 거품 가운데에는 백원짜리 동전만한 크기로 잘게 부순 찻잎을 뿌려 올렸다. 거품이 표면을 덮고 있지만 차를 마실 땐 거품과 차가 적당히 섞여 들어온다. 볼이 넓기 때문이다. 마시다보면 표면의 찻잎이 한걸음씩 내 쪽으로 움직인다. 약간 어긋난 균형이 왠지 더 예뻐보인다. 차 향이 강하진 않다. 대신 온도와 당도가 알맞고 따뜻함이 오래 유지되어서 시간을 두고 조금씩 마시기에 좋다. 함께 나온 쿠키도 두 세번 나누어 곁들이기에 나쁘지 않다. 



성수동, 블루보틀

 모든 감각은 연결되어 있다. 미각도 마찬가지이다. 코를 막으면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흔한 상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주는 시각, 촉각, 청각적 자극도 미각에 영향을 끼친다. 그것들이 버무려져 머릿속에 형성하는 이미지는 지금 내가 위치한 이곳에서의 나의 감정을 구성한다. 감정은 몸과 끝없이 대화를 나누며 미각을 재해석한다. 

 성수동 블루보틀의 뉴올리언즈가 그랬다. 만드는 사람과 관리 상태에 따른 미세한 맛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과 환경의 차이는 그에 앞선다. 2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갔던 블루보틀보다 넓은 매장과 여유로운 환경에서 예쁜 유리잔에 담긴 뉴 올리언즈를 마셨다. 혀 밑으로 살짝 가라앉는 은은한 달달함은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 왠지 붕 뜨는 느낌은 아쉬웠다. 캘리포니아의 쨍한 햇살을 뚫고 투명 플라스틱 컵의 차가움을 느끼면서 쭈욱 빨아들였을 때의 시원함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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