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na Sep 02. 2023

모드 전환에 필요한 시간, 1년

내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전환하기

작년 이맘 때였을 것이다. 자주 가는 커피숍에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 테이블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 분들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운동복 차림과 대화 내용으로 보아 근처 헬스장에서 스피닝을 하는 분들인듯 했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집중할 수 있는 내 귀에 그분들의 대화가 꽂힌 이유는, 한 분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며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내용을 듣자하니 꽤 오랜 시간 함께 스피닝을 해온 친목 모임 안에서 불화가 생긴듯 했다.


선생님 앞에서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것이 감정을 터뜨리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 단순 운동 모임 이상의 의미가 있는, 끈끈한 친목을 나누는 사이로 보였다.


그분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리 속에 남아, 그 뒤로도 종종 떠오르곤 했다. 왜일까? 왜 일면식도 없는 그분들의 모습이 이토록 선명히 남아있는 것일까?


그때 당시 내 상황은 막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격차가 너무 컸고, 일이 없을 때는 몇 개월씩 백수처럼 지냈다. 백수라고 해도 맘껏 일을 구하기는 어려운 전업주부 백수였다. 좋은 기회가 와도 아이 케어와 시간 배분 문제에 걸려 늘 망설여졌다.


무리가 가더라도 일에 전력투구할 것인가, 아니면 일을 내려놓고 아이 양육에 더 신경쓸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던 참에 그분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것이다.


내가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을 잠시 엿본 것 같았다. 어머님들이 친목 모임을 갖는 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엄마도, 시어머님도 각각 성당과 교회에서 비슷한 친목 활동을 하며 건강히 지내신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일에서 완전히 손에서 놓게 되었을 때, 그리고 사회적인 소속감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어디에서 나의 효능감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타인의 인정과 소속감을 찾아 헤매지 않으리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을까?


나만의 전문 분야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과연 내게 진정한 만족감과 행복을 줄 수 있을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종교 모임, 운동이나 취미 모임이 사이드 성격의 가벼운 사적 모임이 아니라, 일처럼 중요해져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게 되진 않을까?


미혼일 때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사실이 바로 내 ‘일’의 존재감이다. 나의 효능감과 자존감을 지켜주고, 사사로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며, 원하지 않는 인간관계에 얽힐 가능성을 줄여준다.


결혼 초 시부모님이 자주 보자고 은근한 압박을 해올 때도, 별로 반갑지 않은 지인들이 자꾸 만나자고 연락해올 때에도 일은 나에게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처였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때 커피숍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는 나도 몰랐던 마음 속 두려움을 자극했던 것 같다. 물론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분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마음 속 두려움을 일깨워준 상징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뜻이다.


내가 여전히 미혼 때의 습관과 페이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건 아닐까,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정이 생기고 아이를 키우며 잠시 정신을 놓고있다보면, 일과 나의 세계는 저 멀리 둥둥 떠내려가 버리고 만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무리하게 붙잡고 하지 않으면, 일은 서서히 내게서 등을 돌릴 준비를 한다.


일에 대한 집착력이 부족했었다는 반성을 했다. 동네 엄마들 관계에 신경쓰고 아이의 공부나 학원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안일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조금씩 ‘엄마’로서의 일상에만 젖어들고 있었다.


그런 각성이 있은 후 몸에 익숙해진 안일함, 나태함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모드를 바꾸기까지 꼬박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놀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남들이 만들어놓은 플랫폼만 떠돌며 소비자로만 살아가는 내 모습에 허무해졌다.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처럼, 일시적인 즐거움에만 만족하며 주어진 일만 하는 삶이 지겨워졌다.


그렇게 지난 1년은 모드를 전환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구를 롤모델 삼아서도 아닌, 진심으로 내 기준에서 원하는 인간상이 되기 위해 애썼다.


결국 인간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일 때만이 인생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일상에서 조금씩 나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내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확장해가기, 이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내 그릇도 조금씩 커져감을 느낀다. 작은 일에도 자존심 상해하며 분노하던 나였는데, 더 이상 화가 잘 나지 않는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남의 평가와 시선은 두 번째 문제다.


내가 내 할일을 똑바로 안했을 때 자존심이 상하는 인간이 되고싶다. 힘들고 불편한 상황, 남에게 구차한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 계속 거절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 피해다니는 일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운동은 언제나 옳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