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된 K-장녀가 겪게 되는 현실적인 갭
나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으므로 나는 장녀이자 막내로 컸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보다 뭐든지 더 잘했다. 공부도, 운동도 더 잘했고, 눈치도 빨랐으며, 친구도 더 많은, 야무진 딸이었다.
내가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오빠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욕심이 별로 없는, 유순한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오빠에 비해 나는 욕심이 많고 경쟁적이었으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 나의 포지션은 언제나 '귀엽고 당찬' 막내 딸 정도였던 것 같다.
엄마는 몸이 약하고 햑교 공부를 잘 따라가거나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오빠를 케어하느라 늘 바빴다. 눈치가 빠른 나는 부모님께 짐이 되지 않으려고 언제나 내 공부나 할 일을 '알아서 잘' 해왔다.
오빠는 서른 살에 장가를 갔고, 나는 서른 살에 독립을 했다. 혼자 살면서 나의 세계가 점점 더 강해지고 개인적인 꿈과 목표도 변했을 무렵, 나 역시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을 꾸렸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서서히 가족 모임이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친척들과 가족들 모임이 왜 이렇게 불편할까, 처음에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내가 느낀 불편함의 실체를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자아상과 가족들이 기대하는 '딸'이자 '여자'로서의 자아상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은연 중에 사회에서 받는 대우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 개인이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내 분야에서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왔고, 대학원까지 학업을 잘 이어왔으며, 일과 육아의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독립적인 성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 살아왔다. (남편을 포함해서) 그러한 정체성에 맞게 나를 대해주는 사람들만 만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가족들이 보는 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단면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까웠다. 특히 아빠가 날 보며 느끼는 당혹감에 나는 종종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진지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주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격려해주던 아빠가, 갑자기 변하기라도 한 걸까?
아빠는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해서 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보며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사위에게)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했으며, 때로는 이렇게 '자상한' 남편이 어디 있느냐며 한없이 치켜세웠다. 나는 그게 칭찬인 줄 알면서도 마냥 듣기 좋은 느낌은 아니었기에, 그냥 굳은 얼굴이 되곤 했다.
예전처럼 아빠와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내가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빠는 약간 불편한 내색과 함께 지루한 표정을 지었고, 곧 남편의 일과 회사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이 서방은? 여전히 일이 바쁘고? 힘들테니 밥이라도 잘 챙겨줘라.
내 생각보다 '남편'의 존재는 참으로 막강했다. 학교나 회사 안에서의 나는 나 '개인'일 수 있었지만, 가족 모임에서의 나는 그저 '엄마' 또는 누군가의 ‘아내'일 뿐이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모두가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그렇게 대했다.
지금껏 살아온 여정과는 상관없이 결혼한 여자의 삶은 곧바로 평준화되기라도 하는 양, 모두가 나에게 비슷한 질문과 시선을 던졌다.
반면에 어렸을 땐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했던, 참 착했던 내 오빠는, 어느새 모두에게 집안의 '어른' 대우를 받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일 얘기를 길게 늘어놓아도, 그 누구도 말을 자르거나 화제를 돌리는 사람은 없다.
'고년은 참 시집 잘 갔어' 라며 뒤에서 내 칭찬을 하는 어른들도, 오빠를 지칭할 때는 농담조라도 '고놈'이라고 낮춰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쓰니 꼭 내 오빠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핏줄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내 오빠는 좋은 사람이다. 차갑고 개인주의적인 나에 비해 오빠는 정이 많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시샘도 아니고 질투도 아니다. 가정을 꾸린 내가 집안 어른들의 인정을 갈구할 이유도 없다. 그저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해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언제나 존중받고 인정받았던 한 개인이 어떻게 서서히 'invisible' 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나를 세상에 보여지게 할지, 고민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아마 내가 사회생활이나 혼자 독립해서 온전히 경제적으로 나를 책임지며 살아본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결혼했더라면 이런 갭을 잘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이러한 갭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괜시리 피곤하게 사는걸까? ㅎ
여전히 답은 모른 채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