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스스로 외투를 벗으려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나도 동의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주로 인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 같다. 타인을 변화시키기보다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고 확실한 길이니까. 그것이 포기든, 타협이든.
사람이 바뀌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조금씩 '성장'할 수는 있는 것 같다. 내면 깊숙한 곳의 자아는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가꾸어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서,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해 종종 언급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과거 좀 더 젊었던 시절,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런데도 나는 키가 비뚤어진 배처럼 반드시 같은 장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나 자신은 늘 거기에 있으면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취향이 서서히 형성되고 진로에 대한 고민과 탐색이 시작되는 10대를 지나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숨돌릴 틈 없이 '어른'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다. 연애, 취업, 진로, 인간관계... 거칠고 모난 원석이었던 자아가 사회생활을 겪으며 조금씩 깎이고 다듬어진다. 그러면서 사회적 시선과 기대에 맞춰 적당히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스스로가 변했다고 착각할 때도 바로 이 시기이다.
마치 모두가 최신 아파트가 되려고 노력하는 시기랄까? 누군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취를 지닌 한옥이었을 테지만, 다들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하니 쉽게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한옥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아파트가 지닌 편리함과 최신식의 기능이 인정받을 때 행복한 사람이 있고, 생활적인 면은 불편해도 한옥 고유의 독특한 분위기와 개성을 알아봐줄 때 행복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생활을 하며 고쳐야 한다고 여겼던 나의 기질들 -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외모에 관심이 없고, 인간관계를 더 이상 넓히고 싶지 않아 하는 성향 같은 것들 말이다.
왜 그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좀 더 사랑해주지 않았을까? 나 자신에서 벗어나 변화된 어떤 모습이 되어야 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여겼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에 나 자신을 맞추려고 많이 애썼던 것 같다.
그런 시기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후회하지는 않지만, 결국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맞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시점이 온다. 이게 아닌데, 라는 느낌.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는데 행복하지 않은 느낌. 그 터닝포인트가 나처럼 40대에 올 수도, 또는 60대에 올 수도, 어쩌면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기반이 약한 자존감 때문에, 나만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자기 검열 때문에, 남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우리는 자꾸만 '진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원하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요즘, 나는 종종 10대 시절의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아무 사리사욕없이 그저 '좋으니까 좋은' 걸 했던 10대 시절의 취향에서 지금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그때는 무얼 해야 돈을 잘 벌까,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일까, 이런 의식없이 그냥 당연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일상적으로 글을 썼다.
지금은 무언가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부족하고 형편없는 글을 공개해도 될까. 약해진 의욕과 자기 검열의 목소리는 날 끝없이 괴롭힌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형편없는 인간이지만, 단점이라고 보이는 동전 뒷면에는 그만큼의 장점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그 장점을 나부터 인정하고 존중해주려고 한다.
지나친 예민함 뒤에는 그만큼의 섬세한 감성과 꼼꼼함이 있다. 좁은 인간관계 뒤에는 무엇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모두 잊어버리는 폭발적인 집중력이 숨어있기도 하다. 외모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건,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 있다.
결혼 전 나는 가족들에게 왜 그렇게 고집이 세고 까칠하냐는 지적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나와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후에는,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섬세한 양육자라는 말을 듣는다.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며 좋은 점을 바라봐주는 남편 덕분에, 나도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변화해간다.
이발도 잘 하지 않은 채 보푸라기가 잔뜩 난 옷만 입고 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나는 참 귀엽다. 그의 착한 마음과 고상한 인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지적이 아닌 존중과 인정을 받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 같다.
내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몇몇의 아낌없는 사랑과 인정,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이 정도면 녹록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하다고 느낀다.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엄청난 명예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벗기지 못했던 나그네의 외투를, 햇빛은 온화하게 내리쬐며 스스로 벗게 만들었다. 내면의 자아가 빈약할수록, 우리는 그럴듯해 보이는 외투로 꽁꽁 자아를 감추려 한다.
근거 없이 괜찮다는 위로가 아니라, 실패하고 나약하고 형편없었던 내게도 한결같은 햇빛을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스스로 외투를 벗을 거라는걸, 지금의 나는 알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