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지만 눈치없는 척 하기의 고수가 되어가는 이유
'질투'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있다.
1. 명사: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이성(異性) 사이에서 상대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함.
2. 명사: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질투'의 감정은 2번에 대해서다.
아마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질투의 대상이 되어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부러워서 그런 거겠지, 네가 이해해라' 라는 식으로 넘기지만 사실 질투란 생각보다 복합적인 감정이다.
그 기저에는 '나와 비슷하거나 혹은 나보다 못한' 수준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아서 배가 아프다‘라는 심리가 깔려있다.
나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는 '선망'의 감정을 느끼지 질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체로 만만하게 여겨지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
질투의 계기는 부, 외모, 학력, 인기, 직업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고 대인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이랄지, 그 사람만의 독특한 아우라처럼 왠지 모르게 자신들과 달라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일 수도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니 상대방의 질투를 알아채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도 세련되어진다.(나이듦의 몇 안 되는 좋은 점이랄까ㅎ)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눈치없는 척 하기'이다. 나 자신을 과도하게 깎아내리며 겸손을 떨 필요도, 그 사람의 공격에 상처받거나 받아칠 필요조차 없다. 눈치없는 척, 워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넘긴 후 그저 내 갈길에 집중하면 된다.
정작 내가 진심으로 당황했던 부분은 다른 데 있었다. 내가 인생에서 중요시하고 공을 들이는 부분이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질투를 받았을 때다.
30대 중반에서야 이걸 알았는데 그때 진심으로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는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란 걸 깨달았다. 인생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보니 비교도 필요없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의 인정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그때 당시의 지인들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멀어진 사람들의 자리는 진심어린 친구 한두 명, 내가 좋아하는 책의 저자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시간으로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에게 ‘나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아, 나랑 가까이 지내는게 너에게도 좋을 걸’ 하고 어필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권력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에게 '나 이렇게 힘 있는 사람이야, 어때 부럽지'라고 과시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쩌면 그런 표면적인 가치에 대한 갈망이 없어서, 그걸 너무 티를 내서 미움을 받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나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척'이라도 하는 현명함을 발휘했을 텐데, 그때는 젊고 어리석어서 쓸데없이 패기만만했었다.
물론 나도 질투를 느낀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아주 젊은 나이에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그 길로 쭉 집중해서 마침내 성공한 사람을 볼 때 그렇다.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도 되고 부럽기도 하고 그랬었다.
그래서 더 이상 질투를 느끼지 않으려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50대가 되었을 때, '아, 10년 전에라도 시작했으면 좋았을텐데. 지금 돌이켜보니 40대는 참 젊은 나이였네.' 라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말이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일으키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어느 정도 고립되고 나니, 이제서야 진정한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 역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고 내 일에 프로페셔널할 때 타인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다. 중심이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와 깎아내림에 크게 신경쓰이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데이터가 일상 속에 축적되어 있으니까.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힘은 매일매일의 성공적인 일상으로부터 나온다. 아무리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책을 읽고 명상을 해도, 하루하루 쌓아올리는 일상의 힘보단 크진 못한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인간관계에 담을 쌓는 건 아닌가, 중요한 정보에서 나만 제외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자리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미는 사람보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자기 일에 확실하고 자기 세계가 뚜렷한 사람을, 사람들은 더욱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어한다.
내면의 평온함을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더욱이 나처럼 초 예민한 사람은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빠르게 속내가 읽혀서 난감할 때가 참 많다. 일부러 '눈치 없음'을 시전하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고립'을 선택한다. 마치 절전 모드로 전환하듯, 나의 에너지 세이브를 위해.
그래서 종종 '차가운 친절함'을 내세우게 된다. 상대방이 철저한 '타인'일 때만 가능한 친절함을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이렇게 차갑고 사무적인 친절함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진심으로 편안하다. 민감하지 않은 적당한 주제에 대해서만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사무적인 일을 깔끔히 처리한 후 산뜻하게 헤어지며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는 사이.
나는 이것이 '예의'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제발, 부디 이렇게 예의있는 인간이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다. 사적인 질문을 함부로 하지 않고, 칭찬이든 비난이든 함부로 타인을 '평가'하지 않고, 남의 말을 쉽게 옮기지 않는 '정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질투의 감정을 느낄만큼 나를 함부로 '가까운 사람'의 범주로 대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놈의 '정'을 가장해서 타인의 소중한 개인 영역을 흙 묻은 발로 마구 더럽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보다, 차갑게 친절하고 사무적인 사람이 더 편한 건 과연 나 하나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