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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07. 2024

탄천 고라니

 운동을 나간 날이었다. 자전거가 줄을 지어 질주하고 있었다. 자전거 레인 옆 보행자 레인으로 들어서 속보를 시작했다. 20분쯤 걸었을까. 비켜요, 비켜,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자전거 라이더 한 명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양쪽 레인을 걸치고 걸었던 모양이었다. 놀라서 얼른 비켜섰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앞에 있는데 속도는 안 줄이고 소리를 질러대다니 그게 위협이지, 경고냐?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트롯을 있는 대로 틀어 놓고 걷는 사람이 옆을 지나갔다. 머리가 어찔하고 피로가 느껴졌다. 보행자 레인을 빠져 나왔다. 웃자란 잡풀을 헤치고 환삼덩굴을 피해서 물가로 나아가자 나지막한 오르막에 갈대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때 뭔가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몇 미터 앞쪽에서 덩치가 큰 동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라니였다. 풀 위로 드러난 가슴이 넓고 육중해 보였다. 송곳니가 없는 걸 보니 암컷이었다. 나를 보고 저도 놀란 모양이었다. 귀를 바짝 세우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라니와 마주치다니. 고요한 긴장 속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라니에게 가만히 말을 걸었다. 

“안녕? 반가워. 너 여기서 사니? 참 예쁘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사진 한 장 찍을게.”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라니는 정말 가만히 있었다. 사진을 찍자마자 고라니는 획 돌아서서 상류 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갔다. 탐스러운 궁둥이를 들썩이며 멀어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태보전지역인 탄천에 다양한 어류와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굉음과 매연을 밤낮으로 토해내는 동부간선도로가 옆에 있고 수많은 시민들이 분주히 오가는 천변 자투리 녹지에서 고라니를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네이버 지도로 탄천을 찾아보았다. 발원지인 용인에서 집 근처 하류에 이르기까지 녹색으로 표시되는 하천 유역은 턱없이 폭이 좁았다. 그나마도 대부분 아파트나 근린공원, 골프장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제임스 매키넌이 쓴 에세이 「재야생화의 시대」를 읽은 적이 있다. 매키넌은 지난 20세기 동안 인류가 성과를 거둔 바 있는 자연 보호는 이제 한계에 직면했음을 지적한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은 가두어 놓는 것과 다름없는 격리를 전제로 하기에 시간이 지나면 생태계는 균형을 잃고 스스로 회복하지 못해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는 특히 도시의 ‘재야생화’를 주장한다. 인간 중심으로 개발된 도시에 야생이 돌아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야생과 함께 사는 불편은 감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야생은 인간을 가까이 해서 좋은 점이 없지만 야생의 환경이 인간에게 주는 이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탄천변은 한강, 성내천, 장지천이 이어지는 송파 둘레길의 한 구간이다. 자연친화적으로 유명한 21km 순환형 산책길 전체가 고라니가 함께 하는 길이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보행자로 옆 꽃길 너머로 덤불숲과 갈대밭을 넓혀 주면 고라니들의 터가 될 것이다. 생태통로를 만들어 주는 방법도 있다. 차도가 인접한 곳에는 로드킬을 방지할 안전 펜스를 설치해 주면 된다. 곳곳에 유실수를 심어주면 고라니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물이 더 맑아지면 고라니가 좋아하는 수생 식물도 늘어나리라. 모든 게 사람의 이해와 섬세한 배려가 필요한 일이다. 


 고라니는 영어로 물 사슴(water deer)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린다. 물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라니가 멸종 위기종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향유고래, 판다, 치타 같은 희귀동물과 같은 등급의 취약종에 속한다. 더구나 고라니가 서식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영국뿐이며 전체 개체수의 90%가 우리나라에서 산다고 하니 놀랍고 책임감마저 느껴진다. 


 오래 전 영국에 살 때 리치몬드 파크에 간 적이 있다. 자유로이 노니는 사슴 떼를 옆에 두고 피크닉을 즐기는 런던 시민들을 보고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서울 시민들도 그런 복락을 누리지 말란 법은 없다. 한강을 따라 성내천으로 이어진 올림픽 공원 숲에서 고라니 가족을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 여러 물길 주변이 생태적으로 더욱 활기를 되찾는다면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서울 전체 곳곳에서 고라니를 보며 자라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었다. 한결 누그러진 태양과 상쾌한 바람 덕에 탄천변을 걷는 날이 많아졌다. 지난 여름 이후 이곳에 나오는 목적이 운동만은 아니게 되었다. 진녹이 잦아든 풀숲 주변이나 바람에 사그락 거리는 갈대숲을 기웃거린다. 헤엄쳐 물을 건너거나 모래톱에서 쉬고 있는 녀석은 없는지 눈길을 멀리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녀석을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갈대 밑동에 떨어져 있는 털뭉치를 발견했다. 만져보니 누렇고 뻣뻣했다. 고라니 털이었다. 염소 똥보다 조금 큰, 동그랗고 까만 배설물 무더기도 보았다. 지금도 고라니들이 내 주변에서 먹고 싸고 털갈이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야생과 이웃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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