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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05. 2024

7년 만에 개화한 행운목


  혹한이 밤새 눈을 몰고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보통은 포근하게 느껴지는 눈 온 날들과는 다르게 눈 쌓인 아침 창 밖 주차장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시릴 듯 차게 느껴졌다. 잠옷 바람에 한기가 끼쳐서 몸서리를 치며 돌아서는데 베란다 구석 화분에서 뭔가 뻗쳐 나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행운목에서 굵직한 꽃대가 불끈 올라와 꽃봉오리를 여러 개 달고 있는 것이었다. 기대치 않은 반가움에 감탄이 절로 나와, 어머나 웬일이니 너,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매일 베란다에 나와 강아지 배변 패드를 치우는데 꽃대가 이렇게 자라도록 알아보지 못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밑동의 다른 줄기에서도 꽃대가 나와 꽃봉오리를 한 개 달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쯤 물을 줄 때 누렇게 시들고 건조해서 갈라진  이파리들이 눈에 거슬려 전지가위로 몇 개 정리해 준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 행운목은 지난 주말을 낀 설 연휴에 꽃대를 내고 봉오리를 만든 게 틀림없었다.     

 

 2010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이 행운목을 들여놓았다. 그 후 만 12년 동안 네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나는 녀석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집에는 동양란을 비롯해 30개 정도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그중 행운목이 최고참이다. 사오자마자 첫 꽃을 피워더랬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매년 피우겠지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꽃은 6년이 더 지나서  세 번째 집으로 이사 왔을 때서야  볼 수 있었다. 아이들 교육과 입시에 치여 1년이 하루 같이 단조롭고 긴장되어 버겁기만 할 때였다. 남편도 직장에서 큰 고비를 맞고 있었다. 죽이지나 않으려고 물만 좀 주고 베란다에 처박아 두다시피 한 행운목이 초겨울 어느 날 꽃을 피웠다. 뜻하지 않은 개화는 선물 같았다. 언뜻 보면 까칠하게 생긴 흰 꽃잎이 비죽비죽 뻗쳐 털뭉치 같이 뭉친 모양으로 생긴 꽃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라일락 향과 비슷한 듯 하지만 온 집에 퍼질 정도로 진한 꽃향을 바로 옆에서 맡으면 어질어질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두어 달 후 딸아이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남편은 원하던 자리로 이직에 성공하였다.    


          아래 줄기에서 올라온 꽃대에 수액이 흥건하다


 우리 가족은  당시에 행운목이 기쁜 소식의 전조라는 말에 믿음을 가졌다. 언젠가 다른 화분은 다 치워도 행운목만은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두 주에 한 번 정도 물을 주고, 분이 깨져서 분갈이도 해 주었다. 2년 전부터는 다른 화분들과 마찬가지로 일 년에 한두 번 액체 영양제를 꽂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튼실히 자라는 고무나무, 금전수 등과 달리 행운목은 줄기가 비리비리하고  잎에는 늘 윤기가 없었다. 늙어서 그런지 앙상하게 키만 비죽이 큰 게 눈에 거슬려 충동적으로 중간 줄기를 베어버리고는 내 살이 아픈 것 같아 후회를 하기도 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으니 꽃은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못했다.  


 올해는 유독 설날 연휴를 앞두고 새해 기분도 나지 않고 음식 할 맛도 안 났다. 감흥 없이 보낸 연휴가 끝나고 엄동설한에 나타난 행운목 꽃봉오리가 어찌나 기특하고 감사한지! 뭔지 모를 희망에 마음이 들썩였다. 창 밖에 눈이 다시 오고 있었다. 내리는 눈이 마치 흰 행운목 꽃송이가 유유히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 단톡방에 개화 소식과 꽃사진을 전하고 설날에 대충 얼버무린 새해 인사를 감성 충만한 문장으로 써 보냈다.    


 행운목은 꽃 피는 주기가 1년에 한두 번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7년 마다라고 하기도 한다. 정답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자기집 행운목이 꽃을 피우면 크게 기뻐하고 자랑한다. 행운은 본래 자주 만날 수 없는 것이고, 쉽게 보기 어려운 꽃이 피면 행운이 따라올 거라고 믿고 싶으니 나무 이름도 그렇게 붙였을  것이다. 계산해 보니 우리집 행운목도 얼추 7년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보기 어려운 귀한 존재인 것이 확실하다.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이 돌봐주는 조건을 개의치 않고 때가 돼야  꽃을 피우겠다는 의지와 세월을 감각하는 에너지가 저 식물 유전자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약속을 실행한다'는 꽃말은 행운목의 그러한 성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큰 행운을 7년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다. 행운목을 키우며 꽃을 누리고 개화 뒤에 찾아오는 기쁜 일에 감사하고 산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집 행운목은 7년 전에 우리 가족의 행운을 귀띔했다. 얼마 안 있어 꽃봉오리가 만개하면 온 집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꽃향으로 가득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설레며 기다릴 것이다. 내가 신년에 바라는 행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가족의 건강, 무난히 각자의 일 해내기, 신앙의 성장, 서로 사랑을 잘 표현하기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꽃을 따라 그중 하나만 와 준대도 우리 가족은 올해 큰 행운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이다.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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