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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Jan 12. 2024

샌디에고 카디프 해변의 아침 산책

 올케가 빼꼼이 방문을 열고 언니, 바닷가에 갈래요? 했다. 시차 적응이 안 돼 밤을 새우다시피한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집 근처에서 커피를 사서 해변으로 향했다. 샌디에고 카운티에 있는 올케 집에서 바다는 차로 20분 거리였다. 주차를 하고 야자수가 일렬로 늘어선 해안 도로를 따라 산책을 시작했다. 저온의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조깅하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 짐승의 낮은 울음 같은 파도 소리 등속이 자연의 파동이 만드는 생태음악처럼 들렸다. 이곳은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 관리하는 카디프 스테이트 비치(Cardiff State Beach)이다.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긴 해안의 절벽은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도로 따라 하지만 해변에 이르기까지 편의점, 커피숍 하나가 없었다.


  모래사장은 폭이 좁고 해변에는 조수 웅덩이가 산재해 있었다. 비치코밍(beachcombing)이라고 적힌 푯말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치코밍이란 해양 쓰레기를 주워 그것으로 예술품을 만들어 일상 안으로 환경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언젠가 국내 한 문화재단이 비치코밍을 소개한 프로젝트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올케가 전하는 비치코밍은 내가 예전에 영상에서 본 것보다 좀 더 확장된 의미였다. 재료를 쓰레기에 한정하지 않고 해초, 조개껍데기, 돌 등 해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수집해서 사용한단다. 이에 더해 살아있는 바다 생명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준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비치코머들이 이 해변에 와서 자연 보호를 겸한 취미활동을 즐긴다고 한다. 

저 끝이 한국이겠지? 올케에게 물었다. 불과 며칠 전에 떠나온 내 나라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왔다. 그때 갑자기 넘실대는 파도 위에 횡렬로 떠 있는 큰 새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집이 큰 개만한 펠리컨 떼였다. 펠리컨들도 우리가 흥미로운지 빤히 쳐다보았다. 까만 단추 같은 눈동자와 커다란 부리 때문인지 새들이 엉뚱하고 코믹한 만화 캐릭터처럼 보였다.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떤 놈은 넙적한 부리 주머니를 쩍쩍 벌려 우리한테 겁을 주려고 했다. 야생 펠리컨과 지척을 두고 마주쳤다는 사실에 나는 흥분되었다. 


 우리는 물속을 맨발로 걸었다. 바닷물은 쨍하게 차가워서 발이 얼얼했다. 올케와 나는 소녀들처럼 깔깔대며 첨벙첨벙 발을 굴렀다. 물에서 나와 우리는 모래사장을 지나 갯바위에 이르렀다. 맨발을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어떤 포식자가 먹다 남긴 바다가재의 꼬리지느러미가 여기 저기 버려져 있었다. 바다 가재를 사냥하는 해양 동물이 마음 놓고 먹이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풍요롭고 안전한 해변이라는 증거였다. 

바다에서 서핑보드를 들고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누군가 굿 모닝, 하고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서퍼였다. 갈색 주름진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건강한 표정에는 젊음이 살아있었다. 새벽부터 서핑만 하고 돌아가는 저런 이들은 대개가 평생을 이 바다와 함께 보낸 토박이들이라고 올케가 귀띔했다. 


 꼬마물떼새 무리가 가느다란 다리로 종종 걸음 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연약한 생명들이 파도에 휩쓸려 몰려다니며 먹이를 찾는 모습을 보니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닭 없이 애처로운 심사가 되었다. 나는 폰 카메라를 줌업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동영상에 담았다. 

귀로로 접어들었다. 도로입구 언덕을 오를 때 올케가, 언니 벌새예요! 하며 옆 나무를 가리켰다. 가슴 높이 열대나무에 붉은 바늘 뭉치 같은 꽃이 만발했는데, 꽃들 사이에서 손가락만한 불그레한 것이 날개를 홰치며 꿀을 빨고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날갯짓에 형체가 어리어리 했지만 언젠가 방송에서 본 벌새가 틀림없었다. 문득 천양희 시인의 시 「벌새가 사는 법」이 떠올랐다.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벌새의 날개 짓을 직접 보니, 왜 시인이 작은 새의 움직임을 시로 옮겨 성찰의 계기로 삼았는지 실감이 났다. 애벌레만한 생명이 하는 행동은 역동적이란 말로는 부족하고 처절하다 할 수 있었다. 새는, 무릇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절실히 살아내는 것이라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경이롭고 숭고한 순간이었다. 

잠깐 나온 산책길에서 뜻밖에 다양한 야생을 만난 일은 내게 특별한 선물이었다. 카디프 해변에서는 야생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해변에 온 사람들 역시 서식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야생과 인간이 동등하게 공존하는 모습은 미상불 아름답고 경이롭기만 했다. 


 올케는 소화가 안 되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이 해변에 와서 걷는다고 한다. 결혼과 함께 타국에 와서 아이들을 낳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기운이 빠져 헛헛할 때나 무언가 씻어 내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왜 없었겠는가. 나는 올케의 이국 생활이 안 돼 보여서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 해변을 가까이 두고 사는 올케가 부러웠다. 


 우리는 그 후로도 서너번 더 해변에서 아침 산책을 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올케와 나는 피붙이처럼 가까워졌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상에 쫓겨 살다가 에너지가 방전될 때면 나는 추억 속으로 들어가 카디프 해변을 걸어본다. 발을 적시는 파도, 파도와 만나 음악을 이루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펠리컨, 벌새, 야생꽃 등을 한참 바라본다. 어느새 내 몸에는 해변에서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온 양 활력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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