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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래원 Feb 29. 2024

고상한 사람

<<인생>> 의 주인공 푸구이같았던 존을 추억하며

 위화의 장편 소설 『인생』을 읽었다. 주인공 푸구이는 현대 중국사의 격랑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하고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일생을 보낸다. 그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농사꾼으로 전락한다. 우연히 국민당 부대를 만나 끌려가서 전투 중에 인민 해방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 년 만에 풀려난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은 열병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1958년 설립된 인민공사는 겨우 가지고 있던 그의 땅뙈기와 가축, 식량까지 몰수한다. 그러던 중 헌혈에 동원되었던 어린 아들은 무리하게 피를 뽑히다가 죽고, 아내는 구루병으로, 딸은 출산 중에 잇달아 세상을 떠난다. 푸구이는 딸이 남기고 간 손자를 사위가 함께 살며 키우려 하지만 몇 년 후 사위도 사고사 한다. 손자와 농사를 지으며 친구처럼 살아가지만 그가 삶아 준 콩을 너무 많이 먹은 탓에 아이마저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마지막은 도살 직전에 처한 늙은 소를 사들여 푸구이가 자기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 의지하며 말년을 보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이런 팔자가 있다니, 하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푸구이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영국에 살 때였다. 존이라는 핸디맨이 있었다. 영국에 간 해 초여름, 세탁기가 고장났을 때 존은 처음 우리 집에 왔다. 노크 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멜빵 청작업복 차림에 키는 작달만했지만 몸은 땅땅한 50대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캡모자를 벗으며 밝게 인사를 건넸다. 얼결에 나도 인사를 했는데 시선이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 한 가닥 없는 그의 민머리로 쏠렸다. 하얗고 반질반질한 것이 꼭 타조알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는 운동화를 벗어 귀퉁이에 가지런히 놓았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이전 현지인 방문객들과는 달랐다. 수리를 마친 후,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비질과 물걸레질을 해서 일한 자리를 말끔히 치우고서야 수리가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일처리가 깔끔하고 예의바른 핸디맨이 마음에 들었다.  

 

 존의 두 번째 방문은 주방 배수에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그날은 일을 마친 존에게 차를 권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존은 자연스레 내게 말을 붙였다. 어색하던 차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의 태도가 반가웠지만 특이한 그의 억양 때문에 소통이 매끄럽지 않은 걸 눈치 챈 존은 영어를 잘 못한다며 겸손해 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는 몰타 해군 출신으로 영국으로 온 지는 스무 해쯤 되었다. 자리를 잡느라 부두 하역 작업, 가드닝, 택시 운전, 이삿짐 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신도 이민자여서 그런지 내가 영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관심을 보였다. 인도 출신인 집주인 푸리 부인과는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몰타에서 함께 온 부인은 지병으로 먼저 떠나고 가족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 다니러 오는 딸이 있었다. 존은 늘 내가 집에 혼자 있으면 현관문을 열어 두는 매너를 잊지 않았다. 그는 작업복을 입은 영국신사였다.   

 

 핸디맨 일이 아닌 다른 일로 내가 존에게 연락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정원 있는 집에 살게 되면 강아지를 키우리라 맘먹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것이었다. 영국에서 어떻게 강아지를 구하는지 몰랐던 나는 허름한 펫숍에서 덜컥 강아지를 사고 말았다. 그런데 데려온 지 사흘도 안 되어 강아지가 혈변을 보았다. 동물 병원에 갔더니 이미 치명적인 병이 들었다고 했다. 벌써 정이 든 데다 아프기까지 한 강아지를 돌려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성급하게 강아지를 산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강아지가 내 품에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속이고 강아지를 판 펫숍에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겁이 났다. 그쪽에서 거절하고 나오면 싸움이 될 것이고, 물정에 어둡고 영어도 부족한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때 존이 생각났다. 그라면 도와 줄 것 같았다. 역시 존은 나서 주었다. 펫숍에 전화를 걸어 내 대신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어느 날 지나다 들른 존은 리플렛을 한 장 내밀며 런던 배터시에 있는 동물 입양 센터 정보니 한 번 꼭 찾아가 보라 했다. 자기가 봉사를 다녔던 곳이라 했다. 살기 바쁜 와중에 봉사까지 하고 산다니 존이 다시 보였다. 

 다음 해 나는 브리더를 통해 강아지를 입양했다(유기견 입양 센터에서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말에 입양을 거절했다). 존은 마치 내가 아기라도 입양한 양 축하해 주었다. 다른 일을 하러 왔다가도 강아지 안전을 위해 울타리 손봐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례를 하려 해도 극구 사양했다. 울타리 넘어 갑자기 출몰하는 여우로부터 강아지를 어떻게 지키는지에 대한 요령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료 구입처, 강아지와 여행하는 요령, 동물 병원까지 추천해 주었다. 백여 마리의 새를 키우고 있다면서 새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새에 문외한인데다 어휘도 낯설어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신나게 이야기를 할 때 존의 행복한 표정으로 그가 새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후, 일이 있어 존이 들렀다. 얼굴이 꺼칠한 것 같아 안부를 물었다가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 있는 종양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머쓱하게 씩 웃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민머리를 두툼한 오른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치료는 받고 있냐고 하니까, 아플 때는 약을 먹고 있고 수술은 받지 않을 거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수술을 해도 소용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경제적 이유로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인지 궁금했으나, 그가 내 물음에 불편해 할까봐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존을 생각하면 타조알 모양의 머리에 달걀만한 종양이 있는 이미지가 떠올라서 그것을 떨쳐내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존은 변함없이 명랑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얼마 후 내가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일이 생겼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간호해주러 왔다 가시고 갑자기 이사도 하고 아이들 전학까지 시키는 등 많은 일이 벌어지면서 존은 나의 일상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소설 『인생 』의 주인공 푸구이는 운명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운명에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초연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나갔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은 고단했으나 아름다웠다. 

 

 비록 존을 일 년 남짓 보았지만 그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인품이 달라지곤 한다. 존은 어떻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실함과 웃음을 잃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위화는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고상함을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위화는 푸구이를 창조했나 보다. 

 

 존은 푸구이처럼 고상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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