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남동생이 안부 차 걸어 온 전화 말미에 고등학생인 조카를 여름 방학에 한 달 정도 한국에 보냈으면 한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창원에 외가도 있지만 서울 사는 나를 믿고 하는 소리였다. 몇 달 전 통화할 때 나하고 아이 얘기를 나눈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딸이 한국의 가족들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한국 문화에 대해 호감을 갖고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고모 역할 한 번 제대로 하겠구나 싶었다.
공항에서 훌쩍 큰 성희를 마주하니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성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표정을 바꿔 밝게 웃으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성희는 도착 이튿날부터 일정에 의욕을 보였다. 아이답게 시차에 바로 적응하는 것 같았다. 나와 성희가 맨 처음 찾은 곳은 집 앞 올리브 영이었다. 미국에서도 이 한국 드러그스토어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그날부터 성희는 K뷰티 러버인 친구들이 부탁한 화장품을 사야 한다고 수시로 올영에 들렀다. 어디, 어디를 가야할지 정하자니까 제 아빠가 할아버지 산소와 경복궁과 북한산은 꼭 가보라고 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날씨가 무더워서 그걸 다 하기는 무리였다. 우선 홍성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온 후 잠실 아쿠아리움과 롯데 타워에 갔다. 나도 조카 덕분에 처음 갔는데 123층 전망대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은 찬란했다. 특히 먼 곳에서부터 보이는 한강의 굽이굽이 물길이 유유한 춤사위의 곡선처럼 한눈에 들어와 성희와 나는 탄성을 질렀다.
다음 날 우리 부부와 성희는 동묘시장에 가기로 했다. 성희는 그날따라 패션에 신경을 썼다. 헤어스타일은 레이어가 많고 뒤가 긴 갈색 바가지 머리였는데 제가 직접 커트하고 염색한 솜씨가 훌륭했다. 옷은 항상 유니섹스 스타일의 상의와 통 넓은 무릎길이 반바지를 입는데 색감뿐 아니라 재질의 매치까지 신경을 썼다. 조카가 동묘 시장을 가려는 건 구제 의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의류 쓰레기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므로 자기는 슬로우 패션 사이클을 위해 구제 옷을 선호한단다. 남편과 나는 성희와 함께 시장 골목을 누볐다. 고모부가 사 주고 싶으니 맘껏 골라 보라고 했지만 성희는 굳이 사양하고 셔츠 딱 한 벌만 선물로 받았다. 어느 옷 가게에서였다. 주인이 성희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 외국에서 온 학생이 용돈으로 사는 거니 좀 깎아 달라고 하자 성희의 안색이 변했다. 부끄러워하며 고모, 하지 마요, 하면서 나를 말렸다. 제 딴엔 고모가 염치없고 주책없어 보여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순간 겸연쩍은 나는 조카딸 눈치를 보면서 그래, 알았다, 하고 그 애가 하는 일을 모른 척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성희는 가급적 우리말을 쓰려고 애썼다. 종업원과 말을 주고받다가 소통이 안 될 때조차 내게 도움 청하기를 꺼려해 난감한 적도 있었다. 하루 일정을 보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넷플릭스를 같이 보곤 했다. 성희는 지브리 컬렉션 덕후였는데 영어 음성을 들으면서도 꼭 한글 자막을 켜 놓는 통에 나까지 일본 에니메이션의 재미에 눈뜨게 되었다.
성희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애는 음식 기호가 남달랐다. 첫날 해준 불고기는 별말 없이 잘 먹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분명한 의사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원래 생선, 계란 외의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해 유연한 채식주의자로 살기로 했다고 했다. 올케는 참기름하고 간장에 밥을 비벼 줘도 잘 먹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내게 당부했었지만, 나는 아침마다 고기는 빼고 생선을 구워 두부, 계란을 번갈아가며 야채를 곁들여 상을 차려 주었다. 그렇게 차려 준 밥상을 남기지 않고 뚝딱 잘 먹으니 밥 해 주는 보람이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성희가 외가 식구들과 도쿄 여행을 가서는 어찌된 일인지 와규 스테이크를 잘 먹었단다. 애는 애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전에 들은 동생의 성희에 대한 걱정은 학교 생활 잘하고 가족에 배려심 있고 상냥했던 애가 얼마 전부터 엇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실하던 애가 숙제를 제 때 안 해 성적이 떨어지고 저밖에 모르고 대화 불통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했지만 안 하던 짓을 하는 딸 때문에 속 꽤나 썩는 느낌이었다. 먼저 자식을 키운 나로서는 그것도 한때라며 위로 했지만, 동생의 귀에는 와 닿지 않는 듯 했다.
동생은 캘리포니아 교육에 불만이 컸다. 성희가 6학년 때였다. 가정통신문을 받아 보고 아연실색 했다. 성교육 수업에 관한 안내였는데 그 내용이 동생이 보기에 최소한 고등학생 정도는 돼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다행히 부모가 원치 않으면 안 들어도 된다는 조건이 있어서 성희는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 젠더 문제나 동물 복지, 환경 보호 같은 사회 문제가 십대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 부각되는 분위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 때문에 성장기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고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 동생의 생각이었다. 개인 비리나 사생활 문제로 자격 논란이 많은 사람들이 교육 전문가랍시고 정책 결정에 관여하고 있는 현실에도 동생은 화가 나 있었다. 마약이나 폭력이 없고 예술 교육으로 뛰어나다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도 부모의 맘이 편치 않은 걸 보니 공교육 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사정은 아닌 듯 했다.
오래 전에 이민 가서 텍사스에 살고 있는 중학교 동창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타인종 아이들은 자라면서 피부색을 비롯한 외모에서 오는 열등감을 경험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나는 성희가 내색은 안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라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한 달을 함께 지내면서 나는 성희가 호기심이 많고 독립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적에만 매몰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어서 대견스러웠다. 또한 제 가치관에 맞는 나름의 라이프스타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어리다 보니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에 공감된다 싶으면 이내 그것을 신념화해서 융통성 없이 실천하려는 고집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은 모두 아이가 건강하게 크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양육을 책임 진 부모는 때로 그런 태도가 힘에 겨울 것이다.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친숙한 부모 앞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 마련이니까.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성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한 학기가 지났을 무렵 동생으로부터 성희 소식을 들었다. 아이가 한국에 다녀온 후 한결 밝아지고 가족들하고도 잘 지낸다고 했다. 동기 부여가 됐다며 공부도 열심히 한단다. 누나 덕분이라고 했다. 동생 목소리가 평온해서 내 마음도 편안했다.
* 월간<<한국산문>> 2024년 11 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