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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21. 2021

타인의 시선

욕망을 버리는 순간에 보이는 것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청소년기에 말투, 옷차림, 행동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꾸몄다. 그게 유행이라고 생각했다. 또래집단의 취향을 따랐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가방 브랜드, 치마 길이, 머리핀 등으로 치장한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 몰려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나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다닌다. 유행이라는 것이 개성이 아닌 셈이었다. 그런 행동 패턴은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자연스레 글 쓰는 성향에도 드러났다. 


학창 시절, 글짓기 대회를 좋아했다. 환경 보호, 효도, 애국 등과 같은 딱딱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입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수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상대가 원하는 결론대로 쓰면 되었다. 


‘원자력 글짓기’는 원자력 에너지를 옹호하는 내용을 전개하면 되었다.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폭로는 입상에서 멀어지는 방법이었다. 주최자가 원자력문화재단이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던 글짓기 대회에서는 한글의 미와 우수성에 관해 서술해야 했다. 영어의 활용도가 한글보다 높다거나, 한글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은 금기였다. 결국 글짓기 대회에서 주최 측 입맛에 맞게 쓰는 것이 중요했다. 마구잡이로 내 생각을 술술 썼던 글짓기에서 입상을 한 적은 없다. 과월호 입상작을 미리 구해 읽는 게 필수였다. 수상의 패턴을 읽고, 그것에 맞춰 작성한 글짓기는 확실한 성과가 있었다. ‘모방은 천재의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리며 수상작을 열심히 읽고 분석했다. 과거엔 그런 개인적 특성이 나의 글짓기 능력을 성장시켰다고 믿었다. 그리고 착각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야!’ 


안나카레리나, 모비딕, 제인에어같은 소설을 읽고 나서도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멈추지 않았다. 머리말, 서평, 타인의 독후감을 읽으며 타인의 글과 나의 감상을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했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그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아니라, 우열을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1928 , 초판본 표지 


대학 시절에도 시, 문학보다 경제서, 미술 평론 책을 좋아했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나 정보성 글을 읽는 일도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취재하고, 정보를 취합하는 능력은 기자에게 주효했다. 기사를 능숙하게 쓰게 되면서 다른 장르의 글에도 도전했다. 즐겨보는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작법을 익힌다면 모두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도전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하고, 드라마 공모전에도 대본을 제출했다. 노력하고 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성과를 낼 수 있는 날이 올 줄 알았다. 내 자질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대충 넘겨듣던 지인 피드백에 집중했고, 내 특성을 깨닫게 됐다. 나에게는 창작자 기질이 부족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특별함일 것이다. 모두가 공감할만한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사회의 시선을 중시하고, 타인의 의견을 취합하는 작업과 달랐다.


‘만약 내가 글짓기 대회가 목적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 특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특이한 어법의 시를 창작하고, 기막힌 스토리로 웹소설을 창작하는 친구를 보면 부러웠다. 작법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나와 달랐던 과거의 습관에 기인할 것이다. 물론 그런 부류의 글을 쓰는 친구들과 나와 다른 장점이 존재했다. 자유로운 성향의 창작자에게 취재와 정보를 취합해 쓰는 글은 불편하고 어려울 수 있다. 가끔 그런 아쉬움을 종이 위에 토로한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노트북에서 하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쓰면 생각이 풍성해진다. 모니터에서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글씨는 쓰는 것보다 종이 위에서 펜으로 쓰면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문단의 끝을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보다 내 생각이 우선이다. 그 자유로운 순간에 가끔 내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다시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생각이 정형화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싫어할 수 있겠어.’

‘세련된 결말은 이렇지 않을 거야.’

‘하이라이트가 이쯤에 있으면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한낮의 커피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보면 배려심 같은게 생겨나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모니터에 글을 쓰면 오타를 그냥 넘기지 않게 되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힌다. 시간에 쫓기며 모니터 앞에서 썼던 많은 글이 ‘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손으로 쓴 글이 돈과 연관된 적은 없었다. 주로 일기나 편지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글이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시간이 마음은 더 행복하다. 잘 나가는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미련이 없는 요즘,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을 즐기게 됐다.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줄을 쫙 긋고, 옆에 다시 쓴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찾아보지 않는다. 국어 선생님도 아닌데 집착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내용의 흐름이 자유로운 특징이 있으며, 결말도 제멋대로다. 완성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순간도 있다. 그 생경함에 놀랄 때도 있다. 언젠가 재밌을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분좋은 기대를 해본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청소년기에 말투, 옷차림, 행동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꾸몄다. 그게 유행이라고 생각했다. 또래집단의 취향을 따랐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가방 브랜드, 치마 길이, 머리핀 등으로 치장한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 몰려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나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다닌다. 유행이라는 게 개성이 아닌 셈이었다. 그런 행동 패턴은 나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다. 글 쓰는 성향에도 드러났다. 


중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를 좋아했다. 환경 보호, 효도, 애국 등과 같은 딱딱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입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수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상대가 원하는 결론대로 쓰면 되었다. 


‘원자력 글짓기’는 원자력 에너지를 옹호하는 내용을 전개하면 되었다.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폭로는 입상에서 멀어지는 방법이었다. 주최자가 원자력문화재단이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던 글짓기 대회에서는 한글의 미와 우수성에 관해 서술해야 했다. 영어의 활용도가 한글보다 높다거나, 한글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은 금기였다. 결국 글짓기 대회에서 주최 측 입맛에 맞게 쓰는 것이 중요했다. 마구잡이로 내 생각을 술술 썼던 글짓기에서 입상을 한 적은 없다. 과월호 입상작을 미리 구해 읽는 게 필수였다. 수상의 패턴을 읽고, 그것에 맞춰 작성한 글짓기는 확실한 성과가 있었다. ‘모방은 천재의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리며 수상작을 열심히 읽고 분석했다. 과거엔 그런 개인적 특성이 나의 글짓기 능력을 성장시켰다고 믿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야!’ 


안나카레리나, 모비딕, 제인에어같은 소설을 읽고 나서도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멈추지 않았다. 머리말, 서평, 타인의 독후감을 읽으며 타인의 글과 나의 감상을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했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그저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아니라, 우열을 따지는 습관을 갖게 됐다.


대전 동구 대전로, 2살, 깜돌

대학 시절에도 시, 문학보다 경제서, 미술 평론 책을 좋아했다. 사실에 근거한 판단이나 정보성 글을 읽는 일도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취재하고, 정보를 취합하는 능력은 기자에게 주효했다. 기사를 능숙하게 쓰게 되면서 다른 장르의 글에도 도전했다. 즐겨보는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작법을 익힌다면 모두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도전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하고, 드라마 공모전에도 대본을 제출했다. 노력하고 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성과를 낼 수 있는 날이 올 줄 알았다. 내 자질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대충 넘겨듣던 지인 피드백에 집중했고, 내 특성을 깨닫게 됐다. 나에게는 창작자 기질이 부족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특별함이다. 모두가 공감할만한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사회의 시선을 중시하고, 타인의 의견을 취합하는 작업과 달랐다.


‘만약 내가 글짓기 대회가 목적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보다 특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특이한 어법의 시를 창작하고, 기막힌 스토리로 웹소설을 창작하는 친구를 보면 부러웠다. 작법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나와 달랐던 과거의 습관에 기인할 것이다. 물론 그런 부류의 글을 쓰는 친구들과 나와 다른 장점이 존재했다. 자유로운 성향의 창작자에게 취재와 정보를 취합해 쓰는 글은 불편하고 어려울 수 있다. 가끔 그런 아쉬움을 종이 위에 토로한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노트북에서 하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쓰면 생각이 풍성해진다. 모니터에서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글씨는 쓰는 것보다 종이 위에서 펜으로 쓰면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문단의 끝을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보다 내 생각이 우선이다. 그 자유로운 순간에 가끔 내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을 만들기도 한다. 반면 다시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생각이 정형화되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싫어할 수 있겠어.’

‘세련된 결말은 이렇지 않을 거야.’

‘하이라이트가 이쯤에 있으면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다 보면 배려심도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한다. 모니터에 글을 쓰면 오타를 그냥 넘기지 않게 되고,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힌다. 시간에 쫓기며 모니터 앞에서 썼던 많은 글이 ‘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손으로 쓴 글이 돈과 연관된 적은 없었다. 주로 일기나 편지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글이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도 없었다. 하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시간이 마음은 더 행복하다. 잘 나가는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미련이 없는 요즘, 손으로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줄을 쫙 긋고, 옆에 다시 쓴다. 맞춤법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도 찾아보지 않는다. 국어 선생님도 아닌데 집착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내용의 흐름이 자유로운 특징이 있으며, 결말도 제멋대로다. 완성된 글을 읽다 보면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순간도 있다. 그 생경함에 놀랄 때도 있다. 언젠가 재밌을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분좋은 기대를 해본다.      




<종이 일기>     


내가 원하는 분야의 작가가 되기 위해서 타인의 글을 수없이 읽습니다. 그들의 문체를 분석하고, 따라 쓰면서,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성공한 작가가 되기도 하지만, 그 행위만 반복적으로 하다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작가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데뷔’라는 시스템이 우리를 작법이라는 틀에 얽매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원하는 장르의 작가로 데뷔하지 못했고, 스스로 불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버렸는데,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니 글 쓰는 게 좋았습니다. 아무 펜으로 끄적거리는 글쓰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손으로 적으면서 느꼈습니다. 글쓰기는 재밌는 작업이라고.     


목표가 생기고, 노트북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내 글을 보여줘야 할 대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은 ‘내 글을 볼 대상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혹시 저 같은 고민을 가진 분이 있다면, 그 작업을 먼저 해보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글 쓰는 힘을 다시 회복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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