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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23. 2021

티켓, 즐거움의 모음

발권이 남겨준 것들 


생각해보면 직접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시, 공연, 영화 중 한 가지를 즐기는 일이 주말의 일부를 차지했다. 야외 레포츠를 즐기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보고 사색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다. 땀이 나는 일보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게 좋았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공연장에서 아름다운 선율과 동작에 매료되었다. 영화 속 배우들의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감상의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미술관의 전시는 교체되고, 해당 공연과 영화의 기간이 있다. 본 것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언제든 자유롭게 볼 수 없다. 관람에는 요금이 존재한다. 내가 그 곳들을 방문할 때마다 받은 입장권을 버릴 수 없던 이유다. 검표를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나서 휴지통에 쿨하게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입장을 하고, 티켓을 핸드백 깊숙이 넣었다. 집에 와서도 버리지 못했다. 소중해서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


그것들을 나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보관했다. 학교에서 연습장으로 쓰던 노트의 각 장 위에 붙여 놓았다. 스프링 연습장이었고, 다 쓴 것을 재활용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미술, 영화, 공연의 장르를 구분하여 붙였다. 뒷면이 특별하지 않은 티켓은 딱풀로 붙였고, 어떤 것은 스테이플러로 고정시켰다. 이따금 그것들을 살펴보며 즐거웠다. 미술 작품을 본 순간에는 감동이 오래 갈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이 다수다. 대중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흐, 세잔, 피카소와 같은 작품의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드물게 선보인 흑인 설치미술가 잉카 쇼니바레, 필립 콜버트 등의 작가의 전시는 한 번 보고 나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생활에서 언급되는 일이 없어서다. 직업과 관련된 일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그럴 때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찾아볼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 순간을 회상한다. 그 날의 티켓을 본다. 전시장 앞에서 단 한 번도 사진을 찍어 본 적이 없다. 이따금 촬영이 허락되는 날에 전시장 안에서 인상 깊은 작품들을 스마트폰을 촬영하기도 하지만, 집에 와서 봤을 때와 현장의 감흥은 다르다. 


내 작품 감상의 원칙은 전시장, 그 자리에서 충분히 감상하는 것이다. 기록을 남기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내가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로 티켓만 남는 셈이다. 가끔 도록도 살 때도 있지만, 전시가 아주 많이 마음에 들 때만 구입한다. 도록을 살 돈으로 전시를 한 번이라도 더 보는 편이다. 5~6년 전에 모은 미술 전시 티켓들은 형체가 그대로인 것들이 대다수다. 두꺼운 용지에 고급 잉크로 인쇄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공연 티켓은 특징이 없다. 초대권의 경우, 공연의 포스터 그림이 있는 티켓을 갖는 게 가능하지만, 구입은 다르다. 인터파크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 예매하게 되는데, 모든 공연은 인터파크 로고가 박힌 같은 디자인의 티켓을 얻게 된다. 그 또한 내게 소중했다. 공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행복해서다. 내가 보는 공연은 주로 뮤지컬과 연극이다. 고민 끝에 예매하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공연장에 간다. 공연 시간과 좌석을 예매하는 일이 압박인 경우도 많다. 


서울 영등포구, 갤러리,  전시 


인기 공연은 티켓이 일찍 마감되며, 취소 시 위약금이 붙는다. 그 관문을 뚫고, 공연장에 들어가 착석하는 자체만로도 짜릿함이 있다. '시카고', '지킬앤하이드', '오페라의 유령' 등과 같은 유명 뮤지컬에 싫증이 나서고 새로운 플롯의 뮤지컬을 찾아 다녔다. 대학로의 뮤지컬도 유명 작가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들이 많았다. 대중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은 더 커졌다. 그 때 알게 된 것이 대구에서 열리는 ‘DIMP(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다. 인도, 대만, 프랑스, 폴란드 등의 다양한 국가의 공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해외여행을 가서 공연을 본 적이 있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뉴욕 브로드웨이 같은 곳에서는 쉽게 공연을 볼 수 있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가는 일 자체가 수월하지 않았다. DIMP는 영어와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보여준다. 보통 가장 더운 6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덥다는 대구에서 열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 처음으로 축제가 시작된 2015년부터 코로나 때문에 공연이 중지된 기간을 제외하고, 매해 방문했다. DIMP의 특별한 점은 외국 배우 4~5명이 하는 소극장 무대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만 뮤지컬 ‘넌 리딩 클럽(Non Reading Club)’은 내가 DIMP에서 본 가장 감명 깊은 공연이다. 


책방을 운영하며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노래와 피아노 연주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폴란드 출신의 여배우 '폴리 네그리(Poli Negri)'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은 수십 명의 배우가 동원된다. 입체 안경을 쓰고 보는 3D 뮤지컬은 내 생에 처음이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유명 뮤지컬과 달리 DIMP에서는 그 해에 공연된 것은 다음 해에 다시 볼 수 없다. 해마다 새로운 국가, 주제의 뮤지컬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티켓을 늘 소중히 간직했다. 다음 해에 그것들을 들고 DIMP에 가면 재관람 혜택도 받을 수 있어서다. 대구에서 공연했던 해외 배우들의 뮤지컬은 보통 서울의 공연장에서 유명 배우들이 출현하는 뮤지컬의 절반 가격이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구 남구 현충로 148,  DIMP 무대


한동안 재즈에 빠졌을 때는 재즈 공연을 찾아다녔고, 발레를 배우면서 발레 공연도 종종 봤다. 그 순간, 그날의 배우 혹은 연주자로부터 받은 느낌은 영원히 간직 될 수 없다. 하지만 티켓을 보면 그 공간에서의 좋았던 기분이 떠오른다. 그 평범한 티켓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뮤지컬이 가끔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디저트 같은 것이라면 영화는 내게 누룽지같은 존재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언제든지 반복해서 볼 수 있어서다. 영화는 내 삶의 많은 순간을 함께 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쉬리’, ‘8월의 크리스마스’, ‘클래식’ 등과 같은 한국 영화들을 대여섯번 이상 다시 관람했다. CGV, 메가박스 등의 영화관 브랜드가 생겨나면서 가까운 곳에서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한몫했다. 영화는 내 일상이 되었다. 매주 새로운 영화가 나왔고, 영화 잡지를 구독하며 그 정보들을 얻었다. 집에서 예매를 하고, 자동판매기에서 영화 티켓을 출력했다. 내가 고르고 선택한 영화를 보았다는 ‘증명서’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시, 인원수가 함께 기록되어 있어 그 영화를 누구와 함께 했는지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딱풀로 노트 위에 붙여 놓았다. 내가 주로 가는 CGV의 티켓은 보관한 지 2년이 넘으면 잉크 글씨가 변색될 정도로 얇은 종이다. 변질된 티켓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부터 PC보다 스마트폰 앱으로 영화를 예매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티켓을 출력할 필요성이 없어져서다. 나 역시 늘 앱으로 예매했지만, 현장에서 종이 발권을 꼭 했다. 어느 날부터 현장의 발권기 화면에 ‘발권 없이 입장이 가능한데, 발권하시겠습니까?’ 라는 문구가 떴다. 그것을 보고 서운함 감정이 들었다. 언젠가는 종이로 발권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발권할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발권하겠어!’


나는 판매기에 뜨는 문구를 무시하고, 요즘도 늘 티켓을 발권한다. 물론 자원 낭비를 하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도 있다. 전시, 공연에 비해 영화를 보는 횟수가 많은 편이다. 자주 갈 때에는 일주일에 한 두 번,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영화관에 간다. 그러다보니 내가 본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도 많다. 웹서핑을 하다 소개된 영화의 플롯을 살피고는 ‘재밌을 것 같아. 한 번 봐야겠어.’ 라는 생각을 하다가 놀라곤 한다. 이미 본 영화이기 때문이다. 당시엔 그토록 재밌고 즐거웠는데, 기억이 흐릿해진 것은 슬픈 일이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를 본 모든 날들의 감상을 기록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기록할 것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는 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압박감이 든다. 분석적인 태도로 영화를 보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건 내 영화 감상 스타일이 아니다. 팝콘을 열심히 먹다가 주인공의 행동 패턴을 놓치거나, 화장실에 다녀와서 플롯을 따라가지 못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슬쩍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찾아보면 된다. 


대학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갖게 됐다. 어차피 수많은 영화를 모두 볼 수 없고, 스토리를 기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영화관에 있는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일이다. 명장면은 유투브에서 다시 돌려보면 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그곳에서 어떤 영화를 보았다’ 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와 어떤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그 날의 컨디션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다. 내가 ‘영화를 본 그 사실’ 자체를 중시하고, 티켓을 소중하게 모으는 이유다.



일이 바쁘거나 감정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일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모아온 티켓들을 보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 그곳에 갈 용기가 생긴다. 그것들을 보고, 즐기며, 행복해한다. 나는 미술, 영화, 공연 중 어느 것에도 전문적인 지식은 없다. 하지만 나름의 즐기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다. 티켓을 모으는 일은 즐거움을 간직하는 가장 최상의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종이 일기>     


누구나 즐거운 순간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그 순간을 기록합니다. 티켓을 모으는 것도 순간을 기억하는 방식이 됩니다. 그 안에는 중요한 정보들이 가득합니다. 함께 그것을 즐긴 사람, 시간, 장소가 적혀 있습니다. 가끔씩 모아놓은 티켓을 살펴봅니다.     


‘그 시간을 정말 재밌게 보냈었어.’     


그저 글씨뿐인 평범한 티켓이지만, 그 순간을 회상하는 근거가 됩니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에는 시간이 들지만, 발권한 티켓을 모으는 일은 시간조차 들지 않습니다. 집의 어느 한 쪽에 모아두면 되는 일입니다. 편리하게 즐거움을 수집하는 저만의 ‘팁(tip)’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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