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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23. 2021

편지, 알고 싶은 나

거울을 꺼내 읽는 일


나에게는 특별한 거울이 있다. 어린 시절, 사람들로부터 받은 편지다. 그것을 보면 나라는 사람의 과거 일상, 특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친구들 사이에서 화자되던 나의 모습, 선생님이 조언하고, 가족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다.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 누군가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보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가 느끼는 대로 내게 대답해주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서로의 이해 관계 따지며, 나 역시 포커페이스로 상대를 대하는 날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잘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는 과하게 친절하고, 경계의 대상에게는 날 선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변한 것은 성인이 된 후다. 학창 시절에는 달랐다. 사춘기 무렵까지 감정의 변화를 감추지 못했다. 


기분 나쁘면 입술을 샐쭉했고, 즐거우면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편지 쓰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지금처럼 이메일과 SNS가 활발하지 않아 손편지가 일상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직접 글을 쓴다는 것은 속마음이 그대로 노출되기 쉬운 행위였다. 상대방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게 부담이 아니라 흥미로웠다.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이유도 많았다. 상대방의 생일, 학교 입학 축하, 방학 직전, 크리스마스, 싸웠을 때, 좋아할 때 등이다. 아직까지 그 편지들을 버리지 않고, 플라스틱 상자 안에 보관하고 있다. 그것들을 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태어나서 한 일 중에 잘한 일로 꼽히는 것 같다. 


‘다소 직설적이야.’

‘무표정이면 화가 난 것 같아.’

‘왜 결정을 못 하고, 시간을 끌어.’


성인이 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업무를 할 때 상대방이 해 온 프로젝트를 피드백해주고 ‘직설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좋은 소리만 하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분 상한 상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에 대한 지적도 달갑지 않았다. 싫어하는 상대방을 향해 미소를 짓는 일은 곤욕이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게 벅찬 일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거절하기 어려워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말하다 보면 답답한 인간으로 비춰지곤 했다. 


서울시 마포구 광성로 6길 22, 포테이포 요리 


사회 초년생 일 때는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당하면 쿨하게 넘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지 못했다. 지적을 당하면 혼자 고민에 빠지거나, 잠을 설치기도 했다. 유리 멘탈이 되어가던 내게 과거의 편지를 읽는 일은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 미정이로부터 받았던 편지는 지금의 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너를 텅텅이라고 놀려서 미안해. 텅텅이라고 부른 것은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세상 너무 복잡하고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진짜 머리 텅텅 비우고 생각해봐, 네 자신을 잊은 채..”


친구가 써 준 편지 속에서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했고, 새로운 일에 두려움이 많았다. 소심한 성격에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망설이기도 했다. 누군가 내게 ‘오랫동안 생각한다’는 지적의 이유도 될 것 같다. 심플하게 생각하지 못해 모든 일에 걱정이 앞섰고 결정 장애도 있었다. 성인이 되어 겉으로 쿨 한 척 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재고 따지기를 잘하는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모른다.

 

“제가 원래 소심한 성격이거든요. 결정하는데 오래 걸리니 시간을 좀 주세요.” 


내가 먼저 그런 말을 건넸다면, 상대방으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았을 수 있다.  나조차 나를 잘 모르는데,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친구들의 편지를 읽으면 어린 시잘 내가 그다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던 때, 스트레스가 많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이 불편한 순간이 많았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호감을 사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단어와 표정은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넌 참 솔직하고, 착한 친구야.”


중학교 시절, 친구 지혜가 써 준 편지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20년 전의 편지가 오늘의 나를 위로해줬다. 직설적이라는 말에 누군가에게 건네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이 망설여졌다. 상대를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불쾌했을 수 있다. 자신을 자책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지적받은 것들은 수용하고 고쳐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무조건 그것을 고치려는 것보다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의하거나, 그 이유를 묻는 일은 어렵다. 친구 지혜가 준 편지는 나의 성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과도하게 솔직한 성격이 빚어낸 부작용이었다. 그런 성향 탓에 억지로 누군가에게 미소를 짓는 일도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싫은 사람 앞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과거의 편지들을 읽으며 나를 위로하게 되었다. 


서울시 영등포구 선유로 343, 선유도공원 


수많은 편지 중에서 단연 많은 것은 크리스마스카드다. 어느 날부터 이벤트에 둔감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반드시 집에는 트리를 만들어야 했고, 친한 친구들에게는 반드시 카드를 썼다. 고가였던 입체카드는 특별한 친구에게 전했던 것 같다. 오래전에 만든 것이지만, 지금 봐도 세련된 것이 많다. 그 카드에는 친구들이 ‘내가 신경 써서 골랐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나 역시 특별한 카드를 누군가에게 줄지를 결정할 때의 많은 고민을 했다. 모든 친구들에게 입체 카드를 선물하기에는 용돈이 부족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카드를 사기 위해서 문구점에 몇 번씩 들렸다. 누구에게 어떤 카드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래도 더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고가의 입체가드를 보냈고, 덜 친한 친구에게는 평범한 디자인의 카드를 보냈다. 입체카드를 선물할 정도로 좋아했던 친구로부터 평범한 카드를 받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카드를 줬는지 힐끗거리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이 물질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인데, 그 때는 어려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우리 같은 중학생들에게 IMF는 너무 가혹한 것 같아. 용돈이 부족해서 잡지를 접어서 카드를 만들어봤어.”


친구에게 근사한 입체 카드를 선물했는데, 잡지를 접어서 옷의 형태로 만든 카드를 받고 서운했던 기억이다. 매일 떡볶이는 사 먹으면서, 내게 재활용한 종이로 만든 카드를 준 게 괘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럼 마음을 갖고 있던 게 부끄럽다. 친구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시 경제는 ‘금모으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했고, IMF 탓에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집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 친구가 학교에서 티를 내지 않았을 수 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편지를 만들어 준 친구의 정성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너의 다이어리를 몰래 훔쳐봤어. 네가 쓴 문장들 너무 멋있어.”


정연이의 편지에 피식 웃음이 났다. 중학교 2학년이 쓸 수 있었던 멋있는 문장은 아마 내 문장이 아닐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문장을 옮겨 쓰고, 출처를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다이어리에 적어놓곤 했다. 문학소녀였던 그 친구는 문예부 활동을 했고, 늘 책을 가까이했다. 국문과에 갈 줄 알았던 정연이는 수능을 보지 않고 유학을 떠났다. 그 친구의 얇은 목소리와 유독 짧았던 단발머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훌쩍 큰 키에 맨 뒷줄에 앉곤 했는데, 그녀의 글씨는 외모의 느낌과 다르게 작고 귀여웠다. 내면의 아기자기한 감수성이 풍부했기에 그녀가 그립다.  

대전 동구, 태어난 지 6개월, 깜돌 

편지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편지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처음으로 부임했던 여자 선생님이었고, 국어 과목을 담당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특별한 재능이 없던 내게 선생님은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과목보다 그 선생님의 수업은 열심히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부류가 중학생이고, ‘중2병’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당시도 다르지 않았다. 순한 인상의 젊은 여자 선생님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았던 기억이다. 아이들은 장난을 잘 쳤고, 선생님은 잘 받아 주셨다. 나 역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 선생님 앞에서는 조심했다. 장난치는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들기보다 장난스럽게 대응해주거나, 웃음으로 넘기셨다. 내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지혜롭고 멋지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여름 방학 때, 선생님은 우리집에 엽서 한 장을 보내 주셨다. 방학 동안 즐겁고 건강하게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짧은 엽서에 만화 주인공 ‘구피’의 얼굴 그림도 함께 그려 주셨다. 보통 편지를 써도 답장을 주지 않는 선생님이 태반인데, 그런 선생님의 엽서에 매우 감동을 받았었다. 3학년이 되어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못했지만, 복도에서 선생님을 마주치면 매우 반갑게 인사했다. 종종 안부를 묻기도 했다. 졸업할 때, 선생님은 내게 편지와 CD 한 장을 주셨다. 직접 분홍색 색지를 접어서 편지 봉투에 예쁜 편지를 써서 주셨다. 당시 나는 ‘산만하고, 집중력이 없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편지 속 내용은 달랐다. 


“늘 성실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어. 나중에 졸업해도 시간이 되면 선생님 집에 놀러 와.” 


중2병으로 교복 치마를 줄여 입고, 말뚝 박기를 즐기며 성심당 근처 번화가를 활보하던 내게 선생님의 편지는 충격적이기도 했다. 나에게 ‘성실’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정말 성실한 학생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찾았다. 대전의 다른 공립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토론‧독서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애쓰시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좋은 선생님으로 지내고 계셨다. 아직까지 내가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선생님도 분명 반가워하실 것 같다. 언젠가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날, 그 편지를 가져갈 생각이다.




<종이일기> 


스스로를 오해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유로 타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었는지.’      


누구도 그 답변을 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뭔가를 솔직하게 말해주는 일이 두려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는 분명 달랐을 것입니다. 거침없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어린 시절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그 시절,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잊고 지내던 소중했던 사람들에 대한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래전의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들을 꺼내는 일은 잠시 잊고 있던 당신에 대해 기억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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