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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피아 Oct 23. 2021

‘날’이 아닌, ‘나’를 위해

오롯이 나의 취향을 담아

몇 년 전부터 ‘다꾸’가 유행이다. 다이어리 꾸미기의 줄임말이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DIY가 트렌드가 되며 개성이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트, 펜, 스티커로 장식한 다이어리는 개인에게 특별한 만족감을 준다. 젊은 계층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게 성인에게도 확장됐다. 나 역시 다이어리를 쓴다. 중학교 시절 이후로 멈췄던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다이어리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쓰는 방식이 달라진다. 계획 주의자들은 그 해의 목표를 세우고, 달, 월, 주별로 계획을 짠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그날의 성과에 대한 피드백도 한다. 나도 그 방식을 따라서 일과를 기록한 적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며칠 만에 그만두었다. 길을 걸어가다 햇볕이 따스하면 잠시 벤치에 앉고, 푸르고 높은 하늘을 응시하는 삶을 사는 내게 매우 불편한 방식이었다. 회사 보고서를 쓰는 것 같아 계획대로 다이어리에 기록한 일을 해내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쌓였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그 주의 간단한 목표를 쓰고, 그날의 일정만 기록했다. 다이어리를 쓰는 목적은 중요한 일, 약속을 기록해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기입하거나, 애써 꾸미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애교 섞인 글씨와 앙증맞은 그림들로 나의 일과를 표현해봤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예쁘지 않았고, 손발이 오글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제처럼 느껴졌다. 


대전 동구 대전로

몇 달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선택한 방식은 꾸밈없는 건조한 방식의 다이어리를 쓰는 것이었다. 원래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을 선호하고, 흑색의 펜을 선호하는 취향을 반영해 심플한 타입의 다이어리를 사용했다. 겉면은 두꺼운 합판 재질이었고, 주(weekly) 단위만으로 적을 수 있는 흰색 내지를 스프링을 했다. 다이어리 자체 디자인이 단순해서 그 안을 꾸미는 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했다. 검은색 볼펜으로 스케줄만 간략하게 적었다. 무게가 가볍다 보니 휴대성도 좋았다. 평소 미팅을 할 때 기록할 일이 있으면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는 편이라 밖에서 다이어리를 꺼낼 일은 별로 없었다. 정작 집에서만 다이어리를 꺼냈다. 완벽히 나 홀로 공유하는 사물이었다. 


나는 최대한 가벼우면서도 휴대성이 좋은 다이어리를 쓴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심플하고 간결한 디자인의 ‘양지사’ 다이어리를 선택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국내의 회사이며, 가격에 비해 종이 퀄리티가 우수했다. 만년필로 다이어리에도 종종 필기를 하곤 하는데, 양지사 내지는 만년필 전용이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잉크 번짐이 적었다. 펜의 종류에 따라 다를 수 있어서 ‘만년필에 좋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주로 쓰는 제품들과는 궁합이 잘 맞는다. 20g 정도의 다이어리는 핸드백에 넣기에도 부담이 없다. 그곳에 나의 ‘날(day)’을 위한 다이어리를 쓴다.


일과를 기록하는 심플한 다이어리와 달리 장식성이 있는 다이어리도 있다. 바로 내 취향에 대해 쓰는 ‘독서 다이어리’와 ‘공간 다이어리’다. 내 삶의 활력을 주는 요소다. 독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읽은 것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였다. 매일같이 수백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들 중에서 내 손에 쥐어지고, 완독 했다는 것은 특별한 인연이다. 베스트셀러라고 무조건 읽지 않는 내게 더욱 그렇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서점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부스나 소품과 멋있게 책이 전시된 메인 공간에 주목하지 않는다. 가판대를 서성이다가 끌리는 책을 꺼낸다. 제목이 과장된 느낌이 없고, 표지가 심플한 책을 선호한다. 


종잇장이 너무 얇거나, 글씨 사이의 간격이 좁은 것은 피한다.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특정 출판사의 책을 읽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절대 읽지 않는 출판사 중의 한 곳은 내로라하는 유명 출판사다. 내 책 고르는 취향이 일반적이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심혈을 기울여 고른 책 중에서 완독한 것만 독서 다이어리에 기록된다. 읽다 중도에 그만둔 책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만의 원칙이다. 다이어리의 모양은 ‘6공 다이어리’라 일컫는 것으로 가운데 6개의 쇠고리를 벌려 종이를 끼우는 것을 사용한다.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이며, 디자인이 단순하다. 겉면이 투명 PVC 소재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스티커를 부착하기에 알맞다.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 133길 10, 카페 


무채색 계열의 옷을 선호하고, 보석에 대한 관심이 없지만 독서 다이어리 만큼은 내 취향과 다르게 꾸몄다. 단추, 보석 모양의 다양한 비즈로 겉면을 장식했다. 평소 무채색에 비즈나 장식이 없는 옷을 즐겨 입는 나와 다른 느낌이다. 6공 다이어리의 매력은 원하는 속지를 구입해서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에서 나온 제품들도 호환이 쉽다. 혹시 잘못 기록해서 제거하고 싶은 종이가 있으면 고리에서 그 한 장만 빼면 된다는 점도 편리하다. 대형 체인 문구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속지를 판매한다. 처음엔 속지를 고르는 일이 어려웠지만, 자신이 원하는 속지를 발견하면 그것만 사용하게 되어 편해진다. 100개의 책에 대해 기록할 수 있는 속지가 2500원이다. 책 제목, 출판사, 독서 기간, 감명 깊은 구절, 느낀 점이 속지 구성의 전부다. 나의 경우, 감명 깊은 구절에 해당 페이지를 함께 기록한다. 나중에 다시 그 책을 읽을 때, 필요한 부분만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전과 달리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일이 드물다. 워낙 많은 책이 출시되고, 새롭게 알고 싶은 지식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전만큼은 다시 읽고자 노력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법정스님의 무소유, 오쿠다 히데오의 인간 실격 등과 같은 짧은 명작들은 부담 없이 다시 읽기에 편하다. 내가 읽은 한 권의 책을 예쁘고 소중하게 기록하고 싶은 이유다. 유니볼 시그노 0.38 주황색 볼펜으로 책 제목과 출판사명을 쓴다. 감명 깊은 구절은 플래티넘사 플래피 만년필 EF촉으로 쓴다. 마지막으로 느낀 점은 동아 미피 그림이 있는 0.5mm 녹색 볼펜을 사용한다. 보통 쓸 일이 없는 주황색과 녹색 볼펜으로 필기를 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검정색만 쓰다가 화려한 색들을 사용하면 일탈의 느낌도 든다. 내가 고른 회사의 볼펜들은 적당한 가격에 굵기가 가늘고, 오래 쓸 수 있다. 가성비가 뛰어난 제품이다. 속지의 빈 공간에는 그림을 그려 넣는데 주로 색연필을 사용한다.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도 쓴다. 일 년에 한두 번 코엑스에 방문해서 ‘일러스트레이션페어’에서 구입해 온 것들이다. 아끼던 것들이 어딘가에 접착되는 순간 그들만의 역할이 생긴 것 같아 뿌듯해진다. 


공간 다이어리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지역’에 대한 기록이다. 나의 ‘공간’은 ‘지역’이 된다. 총 세 지역에 대한 다이어리가 있다. 내가 태어나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전’, 갈망하여 정착했고, 즐거우면서도 애증의 대상이 된 ‘서울’, 내 취향을 저격하는 낭만적인 마음의 안식처 ‘수원’으로 나뉜다. 공간 다이어리를 쓰게 된 시점은 내가 자주 찾거나 살고 있는 공간에서 느끼는 매일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부터다. 익숙한 장소를 늘 마주한다는 것은 지겨움도 있다. 곁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잊게 되는 것처럼, 공간도 마찬가지다. 익숙해지면 그 공간의 장점과 내 삶에 주는 의미를 잊게 된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삶의 이치를 발견하는 철학가처럼 일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대전 동구 소제동, 벽화


‘대전’이라는 공간과 ‘나’라는 사람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나와 부모님이 태어났고, 여전히 친척들이 대전 곳곳에 산다. 명절만큼은 반드시 대전에서 보냈다. 연구단지가 들어서고 ‘과학도시’라고 불리기 이전의 산과 들이 넓었던 풍경을 기억하는 나 같은 대전 토박이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다. 대전이 수도권에 비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노잼의 도시’라고 불린 적도 있다. 그 출처는 모르겠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대전이 답답했다. 마천루와 네온사인이 곳곳에 펼쳐진 수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내 또래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정작 대전을 떠나서 살면서 그곳이 그리웠다. 서울에서 1시간에 오갈 수 있는 KTX 기차가 있다는 게 행운이었다. 과거 서울에 살면서 마음이 지칠 때마다 대전을 찾았다. 공기 좋고 아늑한 보문산 산책로, 대전역 근처의 정감 있는 중앙시장, 소나무와 회색 벽돌이 단조로운 깊이를 보여주는 이응노 미술관, 약간 높은 언덕의 세련된 관사촌 테미오래 등은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다. 같은 장소이지만, 반복적으로 찾다보니 새로운 특징을 매번 발견한다. 울창한 보문산 숲 속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 매일 다른 자연의 모습을 보게 된다. 볕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풀잎의 색상과 새로운 꽃의 탄생 속에서 자연의 신비로움과 다양성을 깨닫는다.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한 대전에는 다른 지역에서 올라와 좌판을 벌이고 특산품을 파는 상인들이 많다. 귀한 버섯, 신선한 야채, 수제 된장 등을 구경하다 보면 두 손 가득 비닐 봉지를 쥔다. 서울의 대형마트보다 저렴하고 품질이 뛰어난 상품도 많다. 상인들이 덤으로 주는 채소를 얻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전에 관광을 온 사람에게 빼놓지 않도록 추천하는 곳은 ‘이응노 미술관’이다. 해외 유명 작가들의 순회전보다 이곳에서 반복적으로 보는 그의 작품에 더 매력적이다. 파리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현대 미술가인 이응노의 아카이브이기도한 그곳에서 보통 일 년에 네 번의 기획전이 열린다. 매번 바뀌는 이응노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연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이 담겨있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으로 유명한 ‘테미오래’는 역사가 잘 보존된 유적지다. 도지사의 관사촌이었던 건물을 복원해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다. 집에서 가깝기도 해서 종종 그곳을 찾는다. 반복적으로 가지만, 전혀 지겹지 않다. 갈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다. 그때의 기분들을 조금씩 다른 언어로 공간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날마다 나의 마음 상태가 달랐고, 글도 늘 변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내가 줄곧 거주했던 곳은 마포다. 신촌에서도 살았지만, 그곳도 마포와 가깝게 붙은 지역이라 내겐 그곳이 그곳 같다. 지하철이 아닌 신촌 기차역 근처의 그래피티가 그려진 동굴을 좋아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을 지날 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이름 모를 아티스트가 페인트칠로 완성된 그 회화를 감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 때 호기심이 생겨 자료를 찾아보다가  미국의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를 알게 됐고, 관련된 서적도 찾아봤다. 그게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하면서, 미술사학을 복수전공 하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안국동, 삼청동, 연남동이다. 미술관과 소품 가게가 즐비한 동네를 자주 찾았다. 값비싼 브랜드의 명품보다 알려지지 않은 디자이너의 수제품을 좋아했다. 이대역 근처에서 직접 만든 구두와 지갑을 팔던 상인들이 사라진 점은 아쉽다. 만약 내가 그 때의 특별했던 개인 로드샵들을 기록해 놓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서울의 단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오래된 건물은 새롭게 리모델링되고, 수익성 없는 매장은 다른 업종으로 빠르게 변신한다. 20대에는 그 변화가 반갑고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변하지 않는 것들’이 그리워졌다. 오래된 것에 열광하고, 물건을 수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종종 주말에 동묘시장에 가서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한다. 몇십 년 전 유럽의 어느 가정집에서 쓰던 저울, 시계, 전등 등을 보면 눈을 뗄 수 없다. 복잡한 방식으로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 우아해 보이기도 하며, 고풍스런 소가구들을 보면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아버지와 함께 삼청동 주변을 돌아다니는 일도 즐겁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황갈색의 토기, 단조로운 문양의 접시, 각양각색의 소반 등을 보면 설렌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 도래해도 흉내 낼 수 없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수원, 수원천 


‘수원’을 여행한 것은 서른 무렵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며 여성 작가 ‘나혜석’에 매료되었다. 전위적인 그녀의 삶에 호기심을 느꼈고, 그녀가 살던 집도 궁금했다. 생가 벽면에는 세련되고, 고집스러운 무표정의 여인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내부에 들어갈 수 없어 건물을 둘러싼 동네를 살폈다. 낮은 층고의 오래된 주택이 밀집되어 있었다. 도심의 빽빽한 아파트에만 살았던 내게 정감 있고 아름다운 주택가였다. 수원화성 옆 행궁동 골목을 걸었고, 그곳에서 작은 공방들을 마주했다. 전각, 도자, 불화 등 전통 미술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작업실도 있다. 신기하고 예쁜 카페도 많이 들어섰다. 

그 아름다운 동네를 발견한 것은 행리단길이라는 별칭이 붙으면서 그 곳이 개발되기 전이다. 아마 7년 전쯤이다. 여전히 수원을 좋아하고, 일 년에 서너 번 그곳에 간다. 의자가 푹신한 카페와 우동집이 있고,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시장 축제의 자선 경매에서 이봉주 선수의 러닝화를 낙찰받은 적도 있다. 수원에 갈 때는 주로 혼자 갔다. 서울의 복잡함에 지칠 때쯤 가볍고 짧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나만의 여행지였다. 대전이 변화가 드문 공간이라면, 서울은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원의 변화 속도는 서울과 대전의 중간 쯤인 것 같다. 내가 주로 가는 수원의 지역은 수원화성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구도심이다.  

공간 다이어리를 쓸 때는 휴대하기 좋은 노트로 사용한다.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의 700원짜리 미표백 A6 노트를 쓴다. 미표백 용지는 포장용지로도 쓰인다. 질긴 특성이 있다. 누런색의 종이 빛깔은 검정색 글씨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32매이며, 이것을 두꺼운 종이로 제작된 노트 커버에 끼워 사용한다. 노트를 낀 커버는 중학교 때 사용하던 학생용 노트 정도의 무게다. 세 권의 공간 다이어리의 표면에는 ‘대전’, ‘서울’, ‘수원’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 장소에 있거나, 그곳을 떠날 때 해당 공간의 이름이 적힌 노트를 챙긴다. 그리고 그 곳의 한적한 카페에서 내 감정을 기록한다. 내가 있는 지역의 어떤 공간, 그 공간에 오게 된 이유, 공간에서 느끼는 것들을 주로 적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당시 내 감정에 대한 얘기도 쓴다. 그날 겪은 일과 머릿 속을 채우고 있는 고민을 종이에 털어놓는다. 쓰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릴 때도 있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주변의 경관을 본다. 익숙했던 뭔가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휴식을 위해 떠났던 낯선 해외 여행지에서 느낄 수 없는 그 친근함은 딱딱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공간 다이어리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공간에 대한 ‘여행의 기록’다. 비행기를 타고 낯선 국가의 특별한 장소로 떠나는 게 여행은 아니다. 우리의 매일이 여행일지 모른다. 매일 지나치고 대화를 나누게 되는 사람이 다르고, 보는 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한 ‘다이어리(Diary)’의 뜻은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장부’다. 하루의 일과를 보고하듯이 적을 필요가 없다. 책을 읽고 정리한 나의 생각, 공간에 대한 감상 등을 자유롭게 기록하면 된다. 스탬프, 마스킹 테이프, 손 그림 같은 특별한 수단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다이어리의 종이를 응시하고 있는 나의 눈과 펜을 쥔 나의 손이다. 정리의 기술이 뛰어난 것보다 자신이 느낀 것들을 즐겁게 적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다꾸의 고수’가 아닐까. 다이어리를 쓰는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의 기분만을 생각하고 싶다.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나의 다이어리의 모양들이 나를 닮은 이유다.



<종이 일기     


 빡빡하게 스케줄을 짜는 일이 숨막혔습니다. 다이어리에 쓴 스케줄대로 살지 못한 하루가 '실패한 날'처럼 느껴졌으니까요.      

단순하게 한 주의 목표와 그 날의 일정만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우선 용도가 적으니, 다이어리의 사이즈가 작아져 가방도 가벼웠습니다. 문구점에 '다꾸 상품 기획전'에서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다이어리처럼 꾸미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날(day)를 위한 다이어리가 아닌, 날(me) 위한 다이어리 쓰자"     


그런 생각으로 내 일상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바로 공간 다이어리입니다. 대전, 서울, 수원이라는 세 곳에 대한 다이어리를 각각 만들었습니다. 제 고향이거나, 오랫동안 살았거나, 애정이 있는 지역들입니다. 그곳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었습니다. 같은 장소이지만, 얘기가 무한했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의 매일의 감정이 다르고, 만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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