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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나래 Feb 17. 2024

나사로에게 오신 바로 그때

예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 중, 자기 인생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고 있다면 아직 시련받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내 인생과 내 문제를 위하여 누가 계획을 세우고 누가 준비해야 한다는 걸까?

내려놓음의 한 끗 차이가 여기에 있다. 내 인생을 위하여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꼼꼼하게 살펴 진행한다고 해도 어디에선가 새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동반되는 시련은 홀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자기 인생이 달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급하여 계획을 세우기 다반사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찌 개입하시는지 기다려볼 여유도 없이 서두르게 된다. 물론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인생의 계획 외에 앞뒤 재지 않고 서두르는 경우가 또 있다. 가족의 질병 문제가 그것이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남매들이 그랬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였기에 더욱 그랬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예수님이 충분히 고쳐 주실 수 있는 병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멀리 출타 중이셨다. 옆에 계셨더라면 고쳐 주셨을 텐데…. 그런데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고쳐 주실 수 있는 것을 멀리 계신다고 해서 안 고쳐 주실까?

우리는 그 조급함 때문에 자주 판단이 흐려진다. 두 자매는 마음이 급해졌다. 예수께로 사람을 보냈다.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어서 오셔서 고쳐 주시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기대한 것만큼 빨리 오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들의 오라비가 죽었다. 난리가 났다.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말할 수 없이 솟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오빠인데 어쩌면 이러실 수 있어요? 우리 집에 오셔서 늘 우리와 함께 즐기셨잖아요? 우리는 가족과도 같은 관계가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때 오셨다. 두 자매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오시지 않은 탓을 주께 돌리며 급기야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으로 가득 찼던 순간에 말이다. 누구도 예수님의 진짜 계획을 알아차리는 믿음을 보이지는 못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나흘 뒤에 오셨지만 때맞춰 오신 것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간,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인 것을 우리는 늘 간과한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잠들어 있는 나사로를 깨우신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그분이 지체하신 것은 더 큰 기쁨과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이 최고의 이적은 그분의 사업과 신성에 대한 주장에 하나님의 인을 찍는 일이었다 (DA, 529).


가족과도 같은 특별히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계획이었다. 돌아보면 예수님은 내 인생에서도 때맞춰 찾아오곤 하셨다. 당시의 순간은 죽을 듯한 시련이었어도 지나고 나면 가장 적당한 그때,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던 하나님의 시간과 그때를 기억한다.



절실함이 곧 믿음


몇 년 전, 우리 가족이 겪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괌 한인교회 목사로 있는 동생이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 그때 그 시련의 감정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겪었던 그 절박함과 좀 비슷하지 않았을지? 가족이 병이 들면 침착할 수가 없다.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하나님 코앞까지 올라가서 보채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순간이었다.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눈을 뜨고도 기도하는 순간이다. 일에 몰두하다가도 생각만 나면 “하나님!” “하나님, 제발요” 하는 절실함! 절박함! 하나님 코앞까지 올라가 아뢰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나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보채야 하는 순간이다. 불안하고 또 불안한 시간이다.

말씀을 보면 용기가 생기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면 잠시 평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나는 연약한 인간이라 갈대처럼 흔들리고 불안한 현실만 자꾸 본다. 때때로 믿음이 강할 때도 있지만 자신이 없다. 나는 강하고 씩씩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자꾸 암시를 하지만 허사가 된다. 사탄에게 들켜버렸다. 오랫동안 내 멋대로 살았더니 사탄이 내 약점을 자기 것처럼 너무나 잘 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사탄도 활동을 개시한 것 같다. 내가 말씀을 붙들고 씩씩하게 견디려 할 바로 그 순간, 사탄도 나를 붙들고 주저앉히려 안간힘을 쓴다. 흔들림 없이 믿고 확신해야 하는데 수시로 흔들리는 갈대가 된다.

언젠가 내 동생의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 분인 것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내 동생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낯선 감정으로 목격했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를 그냥 두실 리가 없을 거라는 믿음이 그 순간 생겨났다.

그 당시에 동생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보채는 것뿐이었다. 동생이 입국하고 바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단 이틀만을 눈물 바람을 하고 나의 눈물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은혜를 목격하는 감사의 눈물로 바뀌어 갔다. 내 동생의 믿음은 자신을 살릴 것이고 내 믿음은 사랑하는 내 동생을 살릴 것이라는 절실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개입하고 이끄시는 체험의 현장에 우리는 올려졌다.

가장 불안한 순간에 떠올랐던 말씀이다. “이는 약한 데서 내 능력이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더없이 필요한 약한 순간임을 알게 하시고 말씀으로 만나 주셨던 순간이다. 암담했던 그 순간의 절망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보이는 듯했다. 이는 부족하지만 내 믿음이었다. 천지가 무너지고 걱정하는 가족들의 애가 끊어질 일이었지만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다. 그분은 내가 기대한 것을 포기하도록 이끄셨고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 이제 돌아보니 참 감사한 순간이었고 우리에게 필요했던 순간, 그 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시간과 해결 방법을 가지고 계셨다. 모두에게 영광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그때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기적처럼 수술을 마치고 회복하여 교회에 복귀한 동생은 코로나로 언택트 해야 할 시기에 괌 교회를 위하여 준비한 영상설교를 가족 모두에게 공유해 주었다. 동생 목사의 설교를 듣는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그분이 이루신 기적을 다시 한번 감사하는 은혜 넘치는 시간을 누렸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해 조급하고 불안하다면 말씀으로 돌아가 잠잠히 그분의 능력을 읽어볼 일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말씀을 의지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해볼 것이다. 그분은 우리 인생에 언제든 때맞춰 오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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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위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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