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성일 Jan 10. 2019

제26회(마지막회) - 쉬쉬병과 회복 의지 (2)

 산책 후의 정리운동 삼아 이제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조금은 껄끄러울 수 있다. 그리고 보통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지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으로 나아가는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계의 쉬쉬병에 대한 회복 의지를 가지느냐 마느냐라는 것이다.    


 - 뮤지컬 관련 기사들

 뮤지컬에 대한 기사를 쓰거나 취재하는 기자들은 제작사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는 자신 있는 그리고 건강한 기사를 쓸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들은 작품이 보여주는 괜찮은 점들(보도 자료를 통해 접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작품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닫거나 어쩔 수 없이 토를 달고 가는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것일까? 신문, 잡지, TV를 통해 접하는 뮤지컬 관련 기사들은 정말로 수박 겉핥기식의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언론은 사실이 아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배웠다.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사실 안에 있는 진실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기를 외면하는 것일까? 아니면 알고 있어도 쉬쉬하는 것일까? 기자들은 취재를 빌미로 초대권을 요구하기 전에 공연예술에 대해 공부를 좀 하기를 권한다. 만일 그들이 공연예술에 대해,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해진다면 그런 기사를 취재하고 쓰는 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신문기자가 되어 기사를 쓴다는 것에 대해 커다란 책임 의식이 따랐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요즘은 기자들에 대한 신뢰를 하기 힘들다. 글을 쓰는 문법이나 맞춤법도 잘 모르는 기자들이 허다하다. 그런 기자들이 쓰는 뮤지컬에 대한 기사에 어떻게 기대를 할 수 있을까? 결과물인 뮤지컬 공연에 대한 기사는 적지 않게 쏟아져 나오지만 그 결과물의 창작이나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점에 대해 다루는 기사는 드물다. 기자분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쉬쉬하지 말라는.     


 - 브로드웨이라는 우상

 오리지널 브로드웨이팀 내한 공연이라는 말 들어보셨는가? 오리지널 브로드웨이팀은 웬만해서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다.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은 초연 당시의 연기자들로 구성된 프로덕션이다. 나는 수입업자들이 오리지널이라는 말을 버젓이 쓰는 것을 보면서 어디에서 저런 자신감이 생기는지 궁금할 뿐이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은 그들의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전에 시장이 작은 곳으로 옮겨서 공연할 수가 없다. 해외 공연을 위한 팀을 만들어서 올뿐이다. 그들을 오리지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 무엇도 없다. 그러니 제작사든 언론이든 그런 이야기를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해외의 뮤지컬을 수입해서 공연하는 제작사들은 그 작품을 홍보할 때 브로드웨이의 작품이라고 하곤 하는데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작품이 아닌 경우도 많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작품을 브로드웨이 작품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해외 투어팀으로 공연하는 어떤 경우에는 브로드웨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이 출연한다고 하는데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해 본 적이 없는 배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나는 출연을 위해 우리나라에 온 배우에게서-제작사가 이 사람을 두고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홍보한- 직접 자신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 본 일이 없다는 고백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날까? 그것은 브로드웨이라는 곳이 대단한 곳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미신과 같은 환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어떤 이들은 바로 그 환상을 이용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드웨이. 그곳 역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브로드웨이라는 곳을 가진 미국의 뮤지컬계에 그것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예술계 전체에 언제나 의도적이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든 간에 당시의 우상화되고 있던 권력을 거부하고 도전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차르트는 오페라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후기 산물인 만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가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모국의 언어인 독일어로 오페라를 썼다. 조지 엠 코핸(George M. Cohan)은 유럽의 오페레타와 유럽의 오페레타를 동경하는 아류작이 판을 칠 때 외롭게 미국만의 뮤지컬을 개척했다. 경박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쉽게 만들어내는 뮤지컬 코미디가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제롬 컨과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는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최초의 북 뮤지컬(Book Musical) 쇼 보트(The Show Boat)를 썼다. 조지 거쉬인(George Gershwin)은 흑인 얼굴로 분장한 백인 앙상블을 출연시키는 것이 관례였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포기와 베스 공연 제의를 거부했다. 브로드웨이와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는 간판을 이용하는 어떤 면에서 제작자들은 관객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이여, 그들의 사대주의적인 시각을 거부하시라.    


 - 뮤지컬에 관련한 대학 교육

 뮤지컬 관련 과목을 개설한 대학은 과연 대학 교육이랄 만한 수준의 수업 내용을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뮤지컬에 관련된 학과나 수업을 가지고 있는 대학에서 그 과목을 맡은 교수들 중에는 전공을 하지 않고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이 꽤 있다. 물론 한국의 대학에서 뮤지컬 과목이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공을 한 교수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반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뮤지컬이 현장에서 인기를 끌면서 대학도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급조되어 학과나 전공이 개설되고 있다. 그 속도는 뮤지컬 관련 지도자가 양성되는 속도보다 빨라서 대학 교육 수준이 평균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뮤지컬에 관련된 주제를 가진 석사논문들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석사논문의 수준이라 할 수 있는지에 의심이 갈 정도이다. 그 논문을 쓴 이들의 논문 지도 교수들이 뮤지컬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역시 의심해보아야 한다. 이제 대학 자체에서 수익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한 근거가 제도적으로도 마련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대학은 점점 대놓고 ‘장사’를 하려 할 것이다. 학력 배경이 아직도 평가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학위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재학생들은 결석을 하고 시험을 보지 않아도 졸업을 시켜준다. 엄격한 기준보다는 학교의 이름을 빛내주었다는 구실로 대충 넘어간다. (도대체 무엇을 두고 빛내주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준이 흐릿하게 적용되는 것을 보는 성실한 학생들은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학교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고 선생은 학생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선생이 학생들을 위해 헌신할 수 없다면 선생을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많은 대학의 교수들이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 그 누가 뮤지컬 전문가인가?

 뮤지컬 한 편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는 직접 뮤지컬 창작과 제작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국가대항 축구 경기가 끝나면 누구나 축구 전문가인 것처럼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처럼 뮤지컬도 대중적인 그 성격 때문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예술 행위가 전문가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라도 팬, 마니아를 넘어서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축구 경기가 끝나고 이러쿵저러쿵 해도 축구 전문가는 따로 있는 것이다. 뮤지컬 관련 서적이 근래에 들어와서 많이 출판되는데 대부분 해외에서 공연되었거나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한 작품 내용 소개와 그 작품에 대한 개인적 견해 그리고 뒷얘기로 지면을 할애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현지에서 수많은 매체를 통해 알려지는 ‘영어로 된 기삿거리’이다. ‘그들’에게는 그저 상식인 내용이 ‘이들’은 지식으로 이용하면서 정보를 가졌다는 것으로 권력을 가진다. 그런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일지는 몰라도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사실 해외의 공연을 소개하는 책들은 그 책을 쓴 저자가 비행기 티켓과 공연 티켓을 살만한 경제적 여유를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자기 돈을 쓰지 않았다면 특파원이나 기자와 같은 자격으로 남의 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우연한 해외 체류의 기간 동안 뮤지컬을 좋아해서 여러 작품을 보고 감상문을 남겨서 정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계기로 책을 쓴다고 해서 전문가의 시각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뮤지컬이 예술성과 함께 자본주의와 손을 잡고 가고 있다는 상업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해외의 작품을 많이 보았다는 것 자체가 그만한 경제적 여유를 즐겼다는 증빙이 될 수도 있다. 해외의 명품만을 고집하는 명품족들끼리의 유대 형성과 같다. 영화는 기록 예술이기 때문에 개봉을 한 지 한참 지나고도 그 영화를 감상할 수 있지만 뮤지컬은 그와는 다른 공연예술이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그 작품을 체험하지 않으면 그 작품에 대한 감상문이 그 작품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뮤지컬 작품을 소개하는 책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쓴 이들이 검증 없이 전문가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책의 저자들은 뮤지컬에 대한 공연학적 관점이 아닌 매니아적인 시각에 그치고 있다. 워낙 뮤지컬에 대해 체계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해외에 가서 뮤지컬을 좀 보고 소개도 하는 이들이 전문가처럼 대접받았던 적은 있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런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이 뮤지컬 관련 시상식의 심사위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이들은 마치 자신의 작품과 자신이 전문가의 인정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뮤지컬 관련 시상식들에서는 수준 미달의 작품에 상을 주고 그 작품은 그 수강 경력을 마케팅에 이용한다. 그리고 각 단체가 상을 나눠가진다. 권위 없는 그런 시상식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젊은 창작인들을 양산하는 그건 시상식 자체도 조금 더 날카로운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 뮤지컬 동호회의 정체성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인터넷 동호회. 그들은 뮤지컬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여러 제작자들이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동호회의 덩치가 커지면서 그들은 처음의 그 초심을 잃어간다. 제작자들은 자신이 제작하는 작품의 홍보를 위해 그들의 눈치를 본다. 회원의 수가 많을수록 홍보 효과가 크기 때문에 자기 동호회에 잘 보여야 한다는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전자제품의 사용 후기를 관리하기 위해 그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을 초대해서 이런저런 행사를 하는 대기업의 행태와 비슷하게 그들은 뮤지컬 제작사에 압력을 행사한다. 뮤지컬의 제작자들은 그들의 관람 후기와 입소문을 위해 그 힘든 제작 여건 속에서도 엄청난 할인율을 적용시킨 티켓을 그 동호회에 수십 장을 제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뮤지컬을 싸게 보기 위해 동호회 가입을 한다. 이것이 동호회 그들이 원하는 것인가? 동호회가 권력을 가지면서 오히려 한국의 뮤지컬계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정가 100원을 동호회에게는 70원에 해준다는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 정가는 100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70원인 것이다. 쉬쉬병이다. 뮤지컬을 사랑하는 동호회라면 과도한 할인율을 요구하기 전에 관객으로서 하자가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장과 같은 부정직한 제작자의 횡포에 맞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극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어떻게든 싸게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 외에도 나와 뮤지컬을 나의 동료들이 느끼는 많은 답답한 쉬쉬병의 증상들이 있지만 그것들 역시 우리가 그런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느냐에 따라 회복을 하는지 못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쉬쉬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 과거의 모든 것을 까발려서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쉬쉬병에 대해 드러내는 마음은, 마치 우정을 나누는 어떤 두 명의 과학자가 서로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논쟁을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진지한 과학자는 세상의 법칙을 이용해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헌신한다. 나에게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라는,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이 늘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나의 관심사는 실천과 그 실천의 첫걸음인 회복 의지이다. 이 마지막 장을 읽고 상처를 받았거나 기분이 상했다면 나는 술 한잔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기꺼이 그것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맨 정신으로는 회복 의지를 가지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나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함께 한 산책도 길었던 만큼이나 땀을 흘렸고 이제 정리운동도 했다. 어떠신가? 힘들었던 만큼 다리와 폐 그리고 생각이 조금 튼튼해진 것 같지 않으신가? 이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터로 각자 돌아가면 된다. 혹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함께 산책을 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때도 여전히 러닝머신 위가 아닌 진짜 들판을 달리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들판을 달리고 있기를 소원해본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 끝 -        

이전 25화 제25회 - 쉬쉬병과 회복 의지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