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통용되는 나
자신을 지탱시키거나 파멸시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 통용되는’ 자신이다.
<니체*>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져도 왜 행복하지 못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은 많지만 막상 속시원히 내뱉지 못하고 우물우물 말하게 되는 질문이다. 식상하면서도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다. 삶에서 이보다 중요한 질문이 또 있을까?
우리가 타인을 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모습은 대부분 내 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보는 화려한 타인의 모습은 그들 인생 중 몇 번의 인상적인 스냅샷과도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정점일 수도 있는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주로 회자되고 소비된다. 개인이나 기업들이 항상 잘 나갈 때에만 인터뷰가 실리고 기사거리가 되는 것과 같다. 직접 만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유튜브나 기사에서 소개된 사람들에 대한 스냅샷들도 머릿속에 쌓인다. 우리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쌓여온 이러한 타인의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준과 판단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세상에 통용되는 나'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에 통용되는 나'는 일종의 성냥개비와 같다. 성냥개비는 장작에 불을 붙이는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장작을 계속 타오르게 할 수는 없다. 장작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모닥불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냥개비를 멋진 라이터로 바꾼다고 해도 장작 없이는 모닥불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스펙과 자격증을 가진다고 해서 그리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과 직장으로 계속 옮긴다고 해서 행복이 지속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즉 제대로 된 장작들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려한 라이터나 성냥개비도 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성냥불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역할로 충분하다. 평생을 바쳐 더 좋은 라이터로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는 교육에서부터 직업 선택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통용되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인생에서 점점 ‘있는 그대로의 나’는 사라지고 세상에 통용되는 자신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라이터에만 집착하는 것과 같다. 더 큰 문제는 진짜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물론 세상에 통용되는 자신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균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둘 사이에 있는 차이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통용되는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 사이의 차이가 곧 허영심이다.** 따라서 그 차이를 줄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 통용되는 자신을 키우는 만큼 자신의 본래 모습도 같이 키워나가야 한다. 허영심을 줄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두 가지 모습 모두를 끌어올리는 것도 한 방법인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동안에는, 아직 그대 자신의 궤도 위가 아니라 타인의 궤도 위에 서 있다고 굳게 믿어라°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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