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고자 다짐했던 지난날처럼 요즘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빨리 잡아먹힌다고 하지만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데 다행히 잡아먹히진 않았다. 가끔 늦장을 부리고 8시가 훌쩍 넘어서 출근을 하게 되면 집 앞 초등학교로 등교하는 귀여운 초등학생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좀 더 이른 새벽 출근길인 요즘은 직장인 또는 운동 나가시는 어르신들과 마주하게 된다.
출근길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정차해 있던 버스 안에 앉아 있던 나는 창문 넘어 트럭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운전석에는 아저씨가 앉아 계셨고, 옆 조수석에는 아직 앳되 보이는 (물론, 나의 기준에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저 친구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른 새벽부터 작업복을 입고 아침을 시작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지며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교 3학년이던 해에 환경이 급변하여 어쩔 수 없이 학과 공부와 함께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해야 했던 나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됐다. 그렇다고 학과 과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학기 중에는 근로장학생, 교수님 연구실 업무 보조, 전산실 컴퓨터 관리 등 교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두세 개씩 했고, 방학 때는 단기간 목돈을 벌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했다.
여름방학 두 달을 이용하여 에어컨 설치를 하러 다닌 적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 창문 너머로 본 트럭에 앉은 앳된 청년의 모습에서 그때의 내 모습이 오버랩된 것이다.
그해의 여름은 유래 없는 폭염으로 뜨거웠지만, 부전시장의 경도 전자 사장님은 연신 밀려드는 에어컨 주문 전화에 신바람이 났었다. 덕분에 아직 막일에 초짜 티를 벗지 못한 나는 하루하루 고된 노동에 죽어났다.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해서 주문이 많은 날은 밤 10시 11시까지 일을 했다. 에어컨 설치 특성상 늘 사람이 상주하는 건물 내부로 들어가야 했는데, 각양각색의 사람 사는 모습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작고 허름한 판잣집에 소형 에어컨을 설치하러 갔을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사장님은 운전을 하셨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사장님께서 설치 예약한 곳에 전화를 걸어 곧 방문 예정임을 알리라고 하셨다. 나는 전화를 걸었고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되도록 또박또박 말을 전했는데 귀가 어두우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내 목소리를 잘 못 들으셨다. 혹시나 하고 할아버지께 아드님이나 다른 분 안 계시냐고 여쭈어봤더니, 나이 어린 손자를 바꿔 주셨다. 아이에게 곧 에어컨을 설치하러 아저씨들이 집에 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방문했다. 꽤 높은 산 중턱에 있던 마을에 작고 허름한 판잣집이 있었다. 거실 겸 방으로 쓰는 공간과 작은 안방이 있는 집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거실 겸 방으로 쓰는 공간에서 생활하시고 안방은 손자에게 내어 주셨는데, 그 방에 작은 에어컨을 하나 설치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자 세 식구가 같이 사는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집이 오래되어 코어로 벽을 뚫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벽에 균열이 갈 것만 같았다. 낑낑대며 사장님과 그 좁디좁은 공간에 에어컨을 그리고 외벽에 실외기를 설치했다.
할머니께서는 더운데 한 그릇 하라며 시원한 콩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부산의 알만한 부촌 부잣집에 에어컨을 설치하러 가도 물 한잔 못 얻어먹고 나올 때도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콩국수는 정말 눈물 나도록 감사한 것이었다. 자기를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자는 비지땀을 흘리며 선풍기 앞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 바빴다.
내가 사장이라면 “설치 출장비는 안 받고 그냥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 또한 돈을 받고 일하는 일개의 보조원*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잠 오거나 입이 심심할 때 먹으려고 작업복 주머니에 잔뜩 넣어온 사탕 꾸러미만 그 손자에게 다 건네주고 나왔다. 대신에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오늘 설치한 에어컨보다 10배 큰 에어컨을 사드리자고 손자와 약속을 했다. (*시다바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작업보조 또는 조수보다 내가 느낀 체감이 더 명확할 것 같다.)
그 손자도 지금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됐을 것이다. 부디 그때의 그 기억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여전히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뭐 모를 일이다. 그저 나의 작은 바람이다.
정차해 있던 잠깐의 순간에 창문 너머 작업복 입은 앳된 청년의 모습에서 유달리 뜨거웠던 그해 여름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참 치열하게 살았는데, 그리고 비교해 보면 지금 참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무슨 불평불만이 그렇게 많은 거야.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며, 나는 버스 하차벨을 눌렀다.
그래 맞아! 창문 너머, 그땐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