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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zi Apr 15. 2024

安子, Who are you?

2부  남조선방송 그리고 '노란사쓰의 사나이', 남조선이라 써!

4화.  "남조선" 방송 그리고 "노란사쓰의 사나이"


    1970년대 말 어느 날, 상해에 출장 다녀오신 아버지가 여행가방에서 사탕이며 과자며 장난감이며 아이들 옷이며 그런 선물들을 잔뜩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벽돌장 크기의 노르끄레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내가 신기해서 만져 보려고 하자, 아버지가 내 손을 탁 치고는 그 물건을 냉큼 집어 가셨다.

    "이건 안돼!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만지지 마."

아버지가 나에게 그렇게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서 금세 그 물건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느 날 밤, 소변이 마려워서 잠에서 깬 나는 부엌 바닥에 놓아둔 요강(그때는 간이화장실이 밖에 따로 지어져 있어서 아이들은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요강에다 소변을 봤다)에 소변을 보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아버지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처음엔 아버지 코 고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정신 차리고 들어보니 사람 말소리 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뭐지?" 

    나는 그 소리를 한참 듣다가 그만 잠이 쏟아져서 하품을 하며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곧장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전날 밤, 아버지방에서 들려온 이상한 말소리와 노랫소리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새로 탄광을 개발하느라 맨날 밤늦게 귀가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궁금한 건 도저히 못 참는다. 허락 없이는 만지지 말라는 그 물건은 아버지 책상 위에 오뚝 세워져 있었다. 

    그날, 아버지가 그 물건을 냉큼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똑똑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이제 보니 참 신기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정확하게는 벽돌장 한 장 반 정도 크기이고 집어 들어 보니 벽돌장만큼은 아니지만 꽤 무게감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앞면 절반은 줄무늬가 촘촘하게 깊게 파여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원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윗부분에 기다란 유리판이 덮여 있었고 그 속에는 숫자가 2열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첫 줄은 4, 4.5, 5, 6, 7, 8, 9 가 적혀 있었고, 아랫줄에는 500, 600, 700, 800,900, 1000, 1200 이런 수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유리판 양쪽으로 동그란 다이얼이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왼쪽 다이얼을 크게 돌리니 갑자기 찌지직 하고 큰 소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서 다시 원위치시키니 소리가 사라졌다. 이번엔 오른쪽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보았다. 유리판 속에서 빨간 가늠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신기한 생각에 이쪽으로도 돌려보고 반대 방향으로도 돌려 보니 그때마다 빨간 가늠대가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왼쪽 다이얼이 이 물건을 작동하고 소리를 내게 하는 장치라는 걸 알았다. 이번엔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왼쪽 다이얼을 천천히 돌려 보았다. 아까는 들리지 않았던 딸깍 하는 소리가 낮게 들렸고 계속 천천히 돌리니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다이얼을 천천히 돌려 보았다. 빨간 가늠대가 숫자 5 위치에서 숫자 6으로 천천히 이동하자 사람 말소리와 음악소리들이 번갈아 섞여서 들렸다. 계속해서 가늠대를 숫자 9 위치로 천천히 이동시키니, 그 사이사이에 중국어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말소리, 음악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 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조선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인가 그 무렵인지라, 내 중국어 수준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중국어를 알아듣고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음악소리가 들려서 나는 소리를 좀 더 키우고 한참 "감상"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악기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피아노 연주도 있었고 교향악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러시아 방송이 유독 많았던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물건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음악도 신기해서 이 라디오는 훗날 아버지가 라디오 기능이 탑재된 일본산 산요 카세트를 새로 장만하기 전까지는 내가 몰래몰래 가지고 놀았던 그 시절 최애의 취미이자 장난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또 소변이 마려워서 깨어 난 나는 기어이 아버지 방에서 들려오는 “조선말”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남자와 여자가 내 한마디 당신 한마디 하면서, 내게 익숙한 대오사구 함경도 사투리와는 전혀 다른, 내 할머니 말투(할머니는 경기도 태생으로 서울말을 하셨다)와 비슷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에 끌려서 살며시 아버지 방문을 열어 보니 아버지는 낮게 코를 골며 주무시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엄마와 각방을 쓰는 아버지는 항상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는 습관이 있었다. 1981년, 중학교 1학년때 큰 기와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나와 동생들은 초가집 안방에서 엄마랑 함께 잤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아버지가 새벽에 즐겨 듣는 그 라디오방송이 "남조선" 방송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 방송프로그램에는 사회교육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도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에 계신 친척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중국은 문화대혁명 동란이 끝나고 등소평이 정치무대에 재등장하면서 한창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시기였는데, "적대국"인 남조선방송을 몰래 듣는다는 건 반혁명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수 없으면 감방살이도 할 수 있는, 결코 권장할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래서 중국동포들은 모두 몰래몰래 새벽시간에 남조선방송을 청취했다고 하는데, 그러다 발각되어 라디오 몰수는 물론 달포 정도 구치소 신세를 지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한다. 

    1980년대 초중반, 홍콩 액션드라마 "곽원갑" "정무문"과 무협 드라마 "사조영웅전" 등이 한창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을 때, 12인치 히타치 흑백 TV와 산요 카세트도 드디어 우리 집 재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중국정부도 더 이상 남조선방송 청취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곧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산요카세트 사용을 막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나팔바지에 긴 장발을 하고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디스코 춤을 추고 다녔다. 더군다나 "곽원갑" "정무문" 같은 액션 드라마에 취해 왕성한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터라 자주 말썽을 일으켰고 심지어 하늘 같은 아버지한테 대들기까지 했다. 아버지방에 몰래 들어가 돈지갑에 손을 대기도 했고 카세트도 "반출"해서 친구네 집에서 밤새 춤추고 놀았다. 결국 아버지는 그 산요카세트를 나한테 양보하고 당신은 새 라디오카세트를 장만했다. 

    어느 날, 내가 책상 앞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데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거 한번 들어봐라. 남조선노래다. " 아버지는 복제 테이프 한 개를 내 책생에 올려놓고 나가셨다. 

    근간에 처음 있는 일이다. 사춘기가 되고 나서 나는 늘 아버지와 각을 세웠고, 그런 나를 아버지는 못마땅해 하셨다. 이 여름방학이 끝나면 나는 읍내에 있는 조선족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거기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한마디로 부모님 간섭 덜 받고 "독립"하는 셈이다. 아버지의 친절에 살짝 당황한 나는 복제 테이프를 손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테이프 라벨에는 빨간 볼펜 글씨로 "남조선 노래"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주고 간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돌렸다. 남자 아나운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명숙이 부릅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하고 소개하자, 젊은 여가수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노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남자가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하고 불렀다. 

    처음 들어보는 남조선 노래는 리듬이나 멜로디가 중국노래와는 완전 다른 장르 였다. 그 무렵 중국은 등려군이 부른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 같은 대만노래나 홍콩가수 장명민이 부른 "아적중국심(나의 중국마음?)" 같은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여가수 목소리도 이쁘고 가사는 "노골적"이면서 귀에 착착 꽂혔다. 나는 그때 막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한 16살 소년이었다. 

    그 테이프에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 외에도 "소양강처녀", "머나먼 고향", "바다가 육지라면", "해 뜰 날",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갈매기", "울긴 왜 울어" 등 노래들이 녹음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청취하면서 중간중간 이런 노래들을 녹음해 두었던 것이다. 나중에 연변에서 "제대로" 복제한 남조선 테이프들을 사서 듣기 전까지, 중간중간 신호가 좋지 않아 음질도 별로인 그 녹음테이프는 한동안 내 최애의 소장품으로 자리 잡았다. 


    매주 토요일 오후, 방학 종이 울리기 무섭게 대오사구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너나없이 자전거를 타고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왕복 50km도 넘는 그 길에서 우리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부터 "바다가 육지라면" "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등의 남조선 트로트 가요를 떼창으로 부르면서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었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내 입은 마치 축음기 마냥 자동으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흥얼거리고 있다. 그리고 가을햇볕이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가 끝도 없이 늘어 선 도로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황금물결의 논밭과 순수하고 풋풋했던 친구들의 앳된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는 사고로 혹은 지병으로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친구들도 있다.


    1980년대 초에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몰래 "불법" 라디오 청취를 통해 동포사회에 전파된 한국노래들은 남녀노소 물론하고 거의 모든 조선족동포들이 즐겨 부르는 문화생활로 잡리잡기 시작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심수봉의 "그대여 변치 마오" "그대 내 품에", 김수희의 "애모" "사랑의 산촌", 나훈아의 "사랑의 트위스트" "친구여" "사랑의 미로",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울면서 후회하네" 등은 너나없이 가사를 베껴가며 열심히 연습하고 불렀던 노래들이다. 그동안 중국식이나 북한식 혁명가요 혹은 홍콩 대만에서 건너온 중국어유행가요만 듣고 부르던 조선족동포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대변하는 음악장르를 찾은 것이다. 


    한국노래 테이프도 처음에 라디오에서 녹음하던 수준을 벗어나 점차 산업화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국과 중국은 아직 수교는 맺지 않았지만 1983년 발생한 중국민항기 한국 불시착 사건 이후, 양국 정부는 부쩍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점차 민간인들의 왕래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일본패망 후 약 40년간 막혀 있었던 "국경"이 개방되어 일반인들도 친척방문이나 비즈니스 혹은 관광목적으로 중국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분들이 가끔 한국노래 테이프나 <가요무대> 비디오테이프 같은 걸 중국으로 가져다주기도 했고 나중에는 큰 시장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는 아예 그걸 사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경이나 선양, 연변 같은 도시에는 이런 테이프를 구입해서 다시 대량으로 복제해서 판매하는 유통채널도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내가 대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중국에서도 거의 한국과 동시대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회차의 <가요무대> 비디오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고 비디오를 보면서 김동건 사회자의 유머스럽고 재치 있는 말솜씨에 감탄했고 무대 주변으로 살짝살짝 보이는 한국의 현대화한 모습들이 경이로웠다.


    그때 중국동포사회로 전파된 한국문화는 한국노래만 아니었다.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는데, <가요무대>는 물론 한국영화나 드라마 테이프도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장 즐겨 본 영화는 "장군의 아들"이었다. 맨날 무림고수들이 날아다니는 중국 무협지 드라마만 보다가 김두한이나 시라소니, 쌍칼 같은 "영웅"들이 "리얼"하게 치고 박는 액션 장면들을 보니 피가 끓어올랐다. 3부작으로 된 "장군의 아들"은 그 시절 우리들의 최고의 영화였고 나는 아마도 수 십 번도 더 돌려 보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사내 녀석들을 사로잡은 장르가 또 있었다. 바로 한국 에로영화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은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여서, 성인잡지나 영화 같은 건 절대 유통할 수 없는 금지품목이었는데, 어쩌다 홍콩 같은 데서 밀수한 성인잡지나 복제 비디오테이프가 마을에 흘러 들어오면, 그 친구네 집은 순간 동네 젊은 수컷들의 "성지"가 돼버린다. 

    처음 장면부터 홀딱 벗고 섹스만 해대는 홍콩 성인물에 비해 한국에로영화는 그리 노골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스토리 전개가 있었다. "애마부인" "뽕" "영자의 전성시대" 등등, 그리고 지금은 영화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에러영화들을 친구들과 함께 보면서 희희닥거렸다. 그중에서도 과장 수법으로 코믹하게 제작한 "변강쇠"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요즘도 마을사람들은 힘 좋은 남자를 변강쇠라고 부른다. 

    지금은 인터넷과 핸드폰만 있으면, 어젯밤 방송한 따끈따끈한 한국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들을 오늘 바로 중국 해적판 동영상사이트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시대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한류도 크게 유행하고 있지만, 어쩌면 한류는 <겨울연가>보다 훨씬 더 이전에 우리 동포사회로부터 유행했던 게 아닌가 싶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처럼...







5화.  남조선이라고 써! 


    고등학교 1학년때, 우리 학교는 벌써 많은 학생들이 한국사회교육방송국과 펜팔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한-중 수교전이여서 편지가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데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 걸렸다. 그래도 우리는 시간만 나면 한국사회교육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이산가족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회교육방송국에 책이나 사전 같은 걸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미 우리 반에도 사회교육방송국으로부터 "한중사전" "일한사전" "일본어문법" 등 서적들을 받은 애들이 더러 있었다. 

    그 사전들은 하나같이 정교하고 고급스럽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인쇄종이도 그 시절 중국 서점에서는 절대 찾아보기 힘든, 우유처럼 하얀 고급종이를 썼고 책갈피도 인조가죽에 금색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고품질 사전을 처음 "영접"했을 때 마치 외계 문물을 접촉한 것처럼 깜짝 놀랐다. 우리가 그동안 교과서나 선전물에서 보고 들은 남조선은 아직도 다리 밑에 거지들이 우글거리고 미군 탱크가 사람들을 마구 치고 다니는 낙후하고 가난하고 엉망진창인 나라였는데, 우리가 받은 사전이나 서적들은 하나같이 새햐안 종이에 이쁘게 인쇄한 고급진 물건들이었다. 


    그때 나는 같은 반의 한 여자애를 좋아했다. 웃을 때 보조개가 깊게 패이는 귀여운 아이였다. 그 무렵,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빡" 세게 시켰는데, 저녁에도 반드시 교실에서 자율자습이란 걸 하게 했다. 자율자습시간은 밤 9시에 끝나기에, 읍내에서 통학하는 애들은 밤길을 자전거로 혹은 걸어서 귀가해야 했다. 내가 어쩌다가 그 여자애 보디가드를 자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한테 호감이 있던 나는 매일 밤 그녀를 집에다 데려다주었다. 

    어느 겨울밤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자율자습을 끝내고 눈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 집은 읍 북쪽 끝머리에 있었는데, 중간에 빈 집 폐허를 지나야 했다. 소문에 따르면, 몇 년 전에 여기서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귀신을 봤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날따라 달도 뜨지 않아 주위는 어두컴컴했고 가로등도 없는 고요한 밤거리는 나와 그녀의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만 뽀드득뽀드득 들렸다. 우리가 말없이 빈집 폐허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폐허 쪽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꺅 소리 지르며 내 팔에 매달렸다. 솔직히 나도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좀 많이 놀랐다. 남자인 나도 그렇게 크게 놀랐는데 하물며 그녀는 오죽했으랴. 그녀가 내 팔을 어찌나 힘주어 끌어안았는지, 두꺼운 패딩 너머로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몽글하고 느껴졌다. 이성과의 "육체적 접촉"은 처음인지라, 방금 전 "귀신"에 놀란 내 가슴은 더욱 콩닥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그렇게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내 팔을 풀어 주었다. 

    "미안, 너무 놀라서..." 

    "음, 나도 놀랐어. 무슨 소릴까?" 

    "글쎄, 뭐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 같았는데... 난 여기 혼자 지날 땐 너무 무서워서 막 뛰어가거든. 오늘은 너랑 같이 있어서 별로 무섭지 않았는데 갑자기 쿵 하니까, 깜짝 놀랬잖아." 그녀는 멋쩍은지 쿡쿡 웃었다. 

    "너 혹시 남조선 사회교육방송국에 편지 보냈어?" 그녀가 작은 눈덩이를 발로 툭 차면서 물었다. 며칠전에 사회교육방송국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해주었었다.

    "쓰고 있는데 아직 보내지 않았어. 왜?" 

    "나 일한사전 하나 갖고 싶어. 김연화가 저번에 하나 받았거든. 되게 좋아." 

    나도 그 사전 본 적 있다. "엣센스 일한사전"이라고 사이즈는 작은 일기장만 했고 두께는 반뼘 정도로 꽤 두꺼웠다. 종이는 새하얗고, 빨간 커버는 두꺼운 비닐로 한번 더 싸주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 사전이 욕심나서 지금 사회교육방송국에 쓰고 있는 편지에다 부탁할 생각이었다. 

    "알았어. 부탁해 볼게." 

    우리는 마치 한국사회교육방송국을 사전이나 서적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자선단체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편지만 써 보내면 요청한 사전이나 책들을 대개는 받았으니까.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혼자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그 으스스 한 폐허를 지날 때 그녀가 말해준 게 생각나서 나도 후다닥 뛰어갔다. 그랬더니 정말 덜 무서웠다. 

    다음 날 일요일 오전, 나는 밤새 완성한 편지를 들고 읍내 우체국으로 갔다. 중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체국이나 은행 같은 기관은 휴일에도 영업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휴일에는 영업하지 않는 우체국이나 은행을 보고 나는 많이 의아해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회사 다니느라 혹은 장사하느라 평일에 우체국이나 은행 갈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휴일에 문 닫으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우체국이나 은행 일들을 처리하지? 솔직히 그것 만큼은 중국이 한국보다 나은 것 같았다. 

    읍내 우체국은 코딱지만 했다. 그래도 우체국은 공영기관인지라 그 당시 우체국직원들은 제법 우쭐했다. 마치 공무원들처럼 "군림"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서비스태도도 엄청 "불량"하고 퉁명스러웠다. 내가 국제항공우편 봉투를 달라고 하자, 우체국 직원(한족)이 어느 나라로 보낼 거냐고 물었다. 

    "한국으로 보내려구요." 

    "한국은 어느 나라지?" 우체국 직원이 항공우편 봉투를 건네주면서 비꼬듯 물었다. 

    "남조선이 한국입니다." 

    "그럼 남조선이라 할 것이지 왜 한국이라고 말해?"라고 하면서 우체국 직원이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추궁했다. 

    "남조선의 공식명칭은 대한민국이고 줄여서 한국이라고 합니다. 마치 중국의 공식명칭이 중화인민공화국인 것처럼요." 

    내가 서툰 한어로 더듬거리며 설명해 주자 그 우체국 직원은 더 큰 소리로 받아쳤다. "우리는 그딴 걸 몰라. 여기는 중국이야. 중국에서는 남조선이라 불러야 해."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편지봉투에 주소를 적었다. 국제관례에 따라 보내는 사람 이름과 주소가 위에, 그리고 받는 사람 이름과 주소는 아래에 적어야 했다. 중국은 그 반대다. 받는 사람 이름 주소를 위에 적고 보내는 사람 이름 주소는 아래에 적는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처음 국제우편을 보낼 때 나는 그 점이 너무 신기했다. 

    내가 주소를 적은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어서 우체국 직원한테 건네자, 그 직원이 쓱 훑어 보더니 도로 나한테 휙 던져 주었다. 

    "남조선이라 써야 해. 아니면 못 부쳐!" 

    난 봉투에 대한민국이라 적었었다. 

    "남조선이라 쓰면 한국에서 받지 않고 반송할 수도 있어요. 그럼 당신이 책임질거예요?" 내가 서툰 한어로 대들자 그 우체국직원이 인상을 험악하게 쓰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너 학생이지? 여기 조선족고등학교, 너 이름이 뭐니?"  

    순간, 나는 하도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그 직원을 마주 노려 보았다. 

    "주소를 어떻게 쓰던 그건 내 마음입니다. 그것 때문에 편지가 잘못 가더라도 그건 내 책임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전달하려는 내용은 이랬는데 그 당시 내 한어 수준이 형편 없다 보니 저 내용이 정확히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어느 정도 내 말을 알아 들었는지, 어린 학생이 돌발적으로 나오자 조금 당황한 그 직원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아직 어려서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라에는 나라의 규정이란게 있어. 남조선은 남조선이라 적어야 한다고. 아니면 이 편지 부치지 못해. 어쩔거야? 안 부칠거야?" 

    그러면서 주소 다시 적으라면서 새 봉투를 내주었다. 

    편지는 보내야겠고 "남조선" 사회교육방송국에서 주는 사전도 받아야겠고 나는 할 수 없이 새 봉투에 대한민국 대신 남조선이라 적었다. 진짜 그런 규정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암튼 "기싸움"은 그 직원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나는 이듬해 봄에 "남조선"에서 보내 준 <엣센스 일한사전> 을 받았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어 새하얀 책갈피에 "옥희야 사랑한다"라고 적어서 첫사랑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녀한테서 첫 키스를 화답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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