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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ssion fruit Sep 04. 2024

궁극의 역량

직장인 궁극의 역랑: 존버

직원들과 매니저들의 역량개발이 나의 주된 업무다. 요즘 매니저들에게는 코칭이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비즈니스 감각, 시스템적 사고, 전략적 사고, 시장분석, 소통, 의사결정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정말 가장 중요한 역량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일까?


여러 회사를 다니며 여러 매니저를 경험했다. 좋은 매니저, 나쁜 매니저 다 만나봤지만,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매니저는 없었다. (나도 직원으로서 완벽하지 않듯이) 전반적으로 좋다 하는 매니저들은 실력도 있거니와 인성도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전반적으로 나쁘다 하는 매니저들의 요소를 꼽아보자면 이 역시 많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나쁜 매니저는 핵심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이기적인 매니저다. 어쩌다 매니저 쪽으로 얘기가 흘렀지만, 이는 매니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인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그러면 과연 직장인의 궁극의 역량, 궁극기는 무엇일까? 

L&D(Learning & development)를 담당하며 가끔씩 물어본 질문이다.




한 매니저가 있었다. 매니저가 될 당시에는 당연히 실력을 인정받았고, 의욕과 열정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곧 팀원들과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그 불화는 지속되었다. 팀원들로부터 매니저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도, 본인의 매니저에게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직은 계속적으로 인원 감축을 하고 있었고 밑에서는 강하게 치고 올라가려는 부하직원까지 있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경력개발을 위한 다른 제안들이 있기도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건강문제까지 생기며 고전했지만 버티고 버텼다. 그리고 조직 개편이 있던 날,  그녀에게는 천운이 있었던 것일까, 마침 적당한 대체자가 없던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 오히려 승진을 하고 당당히 회사 임원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녀의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이었을까?


한 연차가 제법 높으신 팀장급 직원이 있었다. 과거 Director 자리에 도전했었지만, 실패했었던 아픈 과거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승진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포기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의도적으로 승진 따위와 관련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지금 승진하는 건 오히려 위험한 거야. 늦은 나이에 어설프게 올라갔다가, 구조조정이 있으면 먼저 잘리는 거지. 나는 처자식이 있다고.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해." 


그리고 그 처세는 적중했다. 몇 년 후 회사에 큰 구조조정이 있었고, 많은 Director들과 팀장들이 회사를 나가야 했다. 그 직원은 자리를 지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라는 진부한 표현이 현실이 되었다. 승자는 승진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남은 사람이다. 


이런 얘기들이 한국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홍콩은 노동자 보호가 한국에 비해서 약한 편이다. 노조도 없고, 성과저하로 직원을 자를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 자를 수는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됐다. 적어도 돈이 있어야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때 협상할 수 있다는 것 알고 있어?"


해외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우연히 버스 옆자리에 앉게 된 동료가 얘기했다. 우리 팀이었던 동료가 회사에서 나갔던 일을 말하며, 퇴사 협상에 대해서 얘기해 줬다. 정확한 법이나 규정 같은 것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1년 근무에 1달 월급정도는 쳐서 내보내는 게 통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부분을 퇴사 공지 시에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단다.


"나는 최대한 버틸 거야. 그리고 퇴사를 하더라도 받을 건 다 받고 나가야 하지 않겠어?"


내가 입사한 이래로, 우리 회사는 지속적으로 인원을 줄여왔다. 성장이 정체되고,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역할과 자리들이 많다고 여기는지 여기저기 세계 곳곳에서 비명들이 들려온다. 홍콩 오피스도 예외는 아니다. 홍콩 오피스에는 홍콩 지역 사무실과 아시아 본부 사무실이 함께 있다. 지역 사장님은 당연히 본부 사장님께 보고를 한다. 그런데 이곳 지역 사장님은 본부 사장님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떠도는 얘기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지역 사장님은 패키지를 기다리는지, 바퀴벌레처럼 버틸 거라며 그때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시아 시장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시아 사장님의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이었다. 

아, 인생은 타이밍 이랬던가?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하지만, 타이밍은 버티는 자에게 오는 것인가? 아직 이야기는 진행 중이니 누가 결국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서 지역 사장님은 몇 달은 더 번 듯하다. 아니 몇 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약 한 달 전쯤, 홍콩인 동료와 가볍게 커피를 했다. 대화는 무거웠다. 얼마 전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전 고지도 없이 업무가 바뀌었단다. 많이 화가 났고 그다음은 과연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가라고 할 때까지는 최대한 있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 친구는 헤어질 때 엄지를 추켜올리며 나에게 말했다.


    "Hang in there!" 


우리말로 하면 '존버!' 다. 직장인 궁극의 역량 존버!




    "버틴다고 해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버틸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쭉 견지해 왔던 내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후자로 생각해 왔다. 


    '혹 나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또 내가 그만큼 기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떠나리라. 한번 사는 인생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가치롭게 여기는 일을 하고 살자.'


라는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직장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여기에 하나하나 조건들이 붙어간다.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일단, 밥은 먹고살아야지.

    처자식이 있잖아.

    아, 아이들 학비가 장난이 아니네.

    아이들 학원비는 매년 늘어만 가는구나.

    애들 지금 한국 가면 교육과정이 꼬여서 망하기 쉽네.

    아 여기 홍콩은 한 달만 월급이 끊겨도 월세를 못 내네. (그런데 월세는 계속 오름)

    아, 홍콩에서 이직은 흠... 쉽지 않구나.

     ......


궁극의 역량, 존버력이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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