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글을 발행하기 시작합니다 그간 브런치 마을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여러분께 부족한 글이지만,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사이 기쁨이의 절을 수차례 받으며 모두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아이는 참 사랑이 많은 아이입니다.
... 우리는 피터를 통해 내가 '핵인간(nuclear man)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그는 필연적으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이 이 지상의 생태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 복구 가능성마저 파괴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일부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우리가 존재하는 한시적 기간이 아니라 역사 자체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핵 인간에게 미래는 보장된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래라는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핵 인간에게는 창조적 삶을 사는데 필수적인 연속 의식 (a sense of continu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핵 인간은 자신을 비역사의 일부로 여겨 '지금 여기(the hear and now)' 바로 그 순간만을 중요시합니다... 그가 보이는 반응은 실존적인 인간이 보여주는 갈망이나 기쁨이 아니라, 무관심과 권태입니다. 인간이 희망이나 절망을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인식할 때만 가능합니다.
헨리 나우웬 <The wounded healer>
헨리 나우웬이라는 가톨릭 사제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생애를 잠시 돌아봅니다. 그는 1932년 네덜란드 네이께르끄 출생으로 195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다시 6년 간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2년 간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하였고 마침내 30대에 노트르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는 1981년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강단을 떠나 페루의 빈민가로 들어가 민중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다시 하버드 대학교로 돌아와 강의를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안식을 주지는 못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L' Arche)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심장 마비로 생을 마칠 때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The wounded healer 발췌)
이 책이 출간되었던 해는 지금으로부터 50년이 넘은 그 이전 1972년이었습니다. 송길영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 고려대학 겸임교수의 2023년 발행한 시대예보 <핵 개인의 시대>는 이미 50년 전에 헨리 나우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는 걸 이 책이 발행되고 얼마지 않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핵 개인의 시대입니다 서구 가톨릭 사제이며 심리학자가 50년 전부터 시대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며 뚜렷한 양상을 사전에 예측한 것처럼 지금의 시대는 모두가 홀로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처럼 여겨집니다.
지금 K- 컬처의 대세 속에 뚜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사분오열 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송길영 교수의 지적대로 쪼개지고, 흩어지고, 홀로 서 있는 시대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느덧 반강제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시대, 무언가 뚜렷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어디에 있는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저층민으로 내려가는 시대로 변모되고 있습니다. 고독사의 상당수가 청년들이라는 기사는 더 이상 낯선 기사제목이 아닌 게 되었고 지금의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청년 시대의 일자리 극적인 감소, 갈수록 줄어가는 출생률 0.68명, 이대로 가면 청년 시대 반토막이라는 자극적인 기사제목이 여기저기 난무하지만, 실효성 있는 대책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삶의 의지를 꺾인 채 결혼도 하지 않고 직장도 갖지 못하는 어려움 속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무기력과 우울감 속에서, 처음으로 부모 세대 보다 못 사는 세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때이기도 합니다.
핵개인으로 살아가는 인간, 비슷한 말로 핵 인간으로 지칭된 우리들은 임기응변적인 삶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순간적이며, 즉석에서 이뤄지는 결정이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경험을 추구하지만, 그 경험이 아주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핵 인간은 회의하며 살아가는 개인이 되었습니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우리는 여기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버겁습니다 지금 현실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일단 오늘을 살아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저마다 부여받은 창조성이 계속되는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꺾이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창조적인 존재로 태어났는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고,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단절되고, 단편화된 우리의 사고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서 한 발짝 내딛을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기를 망설여지게 합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은 없어 보이며, 돈이 최고이고, 권력을 가질 때라야 비로소 우리의 자아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어느 때보다 굳어지고 있습니다.
반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돈이 많아지고 권력을 향유하게 되면 우리는 핵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상황과 사건 앞에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갈 힘을 가지게 될 수 있을까요? 냉소적인 우리 마음밭이 다시 온화해지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 그 위에 어떤 곡식도 ' 다시'심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로 바뀔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 밭에서 보기 좋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자라고, 진정 수확철에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풍년의 시대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비실체적인 우리 자신의 야망과 충동으로부터 창조적인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이루는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지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 한다고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인간 스스로가 음울한 예측을 함으로써 괴로워하는 중에 결국 그 예언이 이뤄지도록 허용하고 마는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핵 인간은 어느 면에서 마비 상태로 살아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유기적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던 품앗이 시대 가운데, 우리가 누렸던 그런 편안함이 없는 굳어진 상태로 뻣뻣하게 살아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면에서 과거의 전통에서 계승해야 할 따뜻함을 많이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산업화라는 기치 아래 모든 것이 수단이 되고,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우리는 '정'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개념조차 없어진 지 오래된 듯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경험적인 초월이 필요합니다. 내가 겪은 삶을 뛰어넘은 경험을 하게 될 때 찾아오는 자유함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마음의 평안, 몸의 평온을 원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잘 살고 싶어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살아가기 너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타인의 예상치 못한 미소를 통해서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연결된(connected)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핵 개인이든 핵 인간이든 시대적으로 정의된 이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본연의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내 안에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 비단 나의 것만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씨름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라고 갈무리한 헨리 나우웬의 정의처럼 우리는 예전에 꿈꾸고 바랬던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again>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꿈꾸게 되면 행동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게 됩니다. 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말처럼 위험해 보이지만, 그렇게 시간을 들이기에는 이미 너무 지나와 버린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내면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부모는 있지만 아버지는 없는 세대라는 그의 지적대로 우리 사회에는 닮고 싶고, 우러러볼 수 있는 많은 존재가 드문 시대에 접어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그런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모델링을 하고 싶을 만큼 넉넉하고 따뜻하며 자신의 삶을 내어줄 줄 아는 그런 성숙한 어른이 부족한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보다 먼저 특정 경험을 한 사람이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고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됩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러한 격려를 해주는 것 역시 중요하고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주위에 수많은 아버지들이 그 역할을 자임하고 후 세대를 격려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파급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아직 그러한 경험을 많이 못해 본 것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실제로 서로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처음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 아빠가 나를 환희의 감정으로 그 곁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직감합니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초대받았다는 걸 온몸으로 느낍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나도 그렇고 내 옆에 형제, 자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랑받아야 할 우리의 형질을 내버려 놓은 채, 성과를 내야만 인정을 받고, 성취를 해야만 대우를 받는 사회로 편입되고 맙니다. 그 사회의 모습이 전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바꾸는 노력은 미진한 상태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랄 때에도 여전히 사랑받으며 자라가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가 존엄한 생명임을 스스로가 인지하면서, 다른 이의 생명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사랑하는 방법을 보면서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의미는 지나칠 정도로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군집을 이뤄가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직장, 동호회, 교회, 동아리,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것을 드러내고, 뿌연 안갯속에서 상대방의 아름다운 실체를 찾아 명확히 밝혀 주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런 사람을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의 안위를 위해서 하는 기도를 넘어선 세상을 가슴에 품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깊은 기도의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의 얼굴 안에서 메시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정의합니다 C.S.Lewis의 책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언급된 인간, 자신의 자아를 찾는 과정과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 그것을 통해 영적인 성장에까지 이르기를 독려하는 부분은 루이스와 헨리 나우웬이 말하고자 하는 많은 부분에 여러 공통분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오늘의 삶'도 두려워하며 지냅니다. 죽음도 두렵지만 삶도 두려운 상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생각해 볼 겨를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앞을 향해 무한정 속도를 냅니다. 그 와중에 번아웃으로 주저앉기도 하고, 그 가운데 완전한 회복에 이르기도 전에 다시 한번 스퍼트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부인을 하던 인정을 하던 한계 지점이 분명히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이웃사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마음을 열어 가볍게 목례를 건넬 수 있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내면과도 더 깊이 사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웃, 친구, 친구의 친구 중에는 나중에 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면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지금 우리는 문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지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어쩌면 소수의 분들만 인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오면서 깨달았던 지점을 말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 만큼 너른 양해를 통해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내어주신 그 사랑만큼 본질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이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내가 아끼는 누군가에게 진정 어린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의 고통스러운 환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요. 그 과정에는 반드시 나에게 미치는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상태에서 사랑하고 아끼는 상대방의 고통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고통을 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와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최소한 비슷한 고통을 겪고 그 시기를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온 사람만이 진정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그가 스스로 짊어지시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창에 찔리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온갖 수난을 겪으며 맞고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는 십자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로 가장 사랑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따르면 부활하셨고 언젠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실제로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벗'이 되어 주고, '버팀목'이 되어 주고, '어른'이 되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강박적입니다. 세상 모든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AI를 알아가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는 점입니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지능을 기계로 구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인풋(입력)을 넣으면 잘못된 아웃풋(결과)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혐오와 거짓, 조장과 과장은 우리 삶에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격려하며, 회복할 수 있는 안내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한 명의 어른으로서 삶의 모범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성숙해지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이 강박적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며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소외, 단절, 고독,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덮을 수 있는 포용, 배려, 관심, 표현, 환대, 사랑의 따뜻한 옷을 입는 것으로 우리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AI 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보다 나은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면 결국 AI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이용되고 활용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 서로에게 환대(hospitality)를 나누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상적인 이야기이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상이 현실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은 우리 개개인에게 모두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치유하는 사역은 어떤 종교인의 행위에 국한할 수 없는 광의의 개념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각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처를 딛고 치료하며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이제 공동체로 모여 다른 이들의 상처를 껴안고 보듬고 함께 아파하는 것에서 출발합시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포용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위에 글과 별개로 11월의 감사를 나눕니다
1. 11월 10일 새벽 4시에 깨어, 저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서술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아 감사합니다
2. 가장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 노력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한이 없이 노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3. 요 며칠 새로운 분들을 만날 수 있게 기회를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새로운 만남 가운데 새로운 배움을 얻었습니다.
4. 미국에 계신 애정하는 선배님이 한국에 방문하시고, 기쁨이와 천사아내와 함께 네 명이서 만나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기쁨 이에게 귀한 음식과 맛있는 초콜릿 다발을 선물해 주신 덕분에 기쁨 이는 매우 행복한 데이트 추억을 남겼습니다.
5.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되고, 연결이 된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는데, 그 이후에 만남과 교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시는 선배님에게 이 글을 통해 진심을 담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6.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선배님을 통해 큰 위로를 얻게 하신 날이 있었습니다. 20년도 더 오래 알아온 선배님이 제게 해 주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커다란 위로가 되었고 실제적인 격려가 되었습니다. 따뜻한 만남을 허락해 주신 선배님에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7. 아들 기쁨 이가 아빠를 따라 파워 J로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둘 다 원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인데, 살아오는 궤적이 녹록지 않은 관계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삶이 추가되었습니다. 무언가를 계획한다고 해서 다 이룰 수 없겠지만 주어진 삶의 환경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8. 기쁨 이가 계획표를 짜고, 그것을 수행한 후 (v) 표시를 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쁨 이의 삶 속에 기쁨이 더욱더욱 더해지고 있습니다. 재활로 많이 힘들고, 요새도 가끔 코피를 쏟는 아이를 보면 많이 마음이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 이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여전히 잘 간직하고, 스스로 발현시켜 나가는 모습이 은혜가 됩니다
9. 기쁨 이가 매일 수차례 큰절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 번이면 된다고 해도, 마음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며 기어코 절하는 아들을 모두 사진으로 추억에 남기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절을 한다는 아이의 첫마디가 무색해지지 않도록 더욱 사랑으로 섬기는 아빠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합니다
10. 요새 언제나 있을 수 있는 AI 강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어느 때에 기회가 닿든 그 기회를 선용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지금 이 시간에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11. 아내가 지난 2주 동안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아빠는 한 달 동안 기침을 달고 살았습니다 잠시 괜찮아졌다가 다시 심해지는 걸 반복하고 있지만, 병원 다니며 약을 먹고 쉴 때는 쉴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합니다
12. 아픈 중에 다시 운동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제 건강해질 일만 남았으니 주님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13. 매일 새벽 3-4시에 깨고 있습니다 더 깊게 자고 싶지만, 한 번 깨면 잠이 오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눕고 있습니다. 새벽 4시 전후로 깨면 아침 3시간을 오롯이 기도 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새벽예배도 드리고, 말씀 묵상도 하지만, 꿀과 같은 기도 시간이 습관이 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14. 최근에 인생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부분에 대해 적을 생각입니다. 변화의 시간, 새로운 인생이 열리기 바로 직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내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고 공부하는 데에만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거란 생각에 마음에 감사가 가득합니다
15. 미적분을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수학을 공부하는 게 어렵지만, 결국 해낼 거라고 믿고 있어 더욱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못할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16. 11/9일 어제는 교회의 배려로 외부 공간에서 기쁨이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참가 8팀 중에 기쁨 이가 정한 이름 <나비팀>으로 저희 가정이 1등을 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비록 아파서 함께 하지 못했지만, 기쁨 이가 태어나서 처음 게임을 통해서라도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기쁨 이가 불편한 몸을 써가며 그동안 재활하면서 키운 힘으로 잘 버텨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뛰면서 분명히 통증이 있었을 텐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잘 견뎌준 아들에게 고마웠습니다
17. 한 주 내내 아이와 함께 재활 병원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엄마가 어렵게 병원에 가더라도 누워 있어야 하는 형편 속에서, 아내와 아이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했습니다. 가족이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이구나 깨달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18. 기쁨 이를 데리고 동네 길을 돌아다니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기쁨 이의 애창곡은 "내게 강 같은 평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라는 찬양입니다. 열 살인데, 이 찬양을 자주 입에 담는 모습이 아빠에게 큰 힘이 됩니다.
19. 최근에 어떤 시도 끝에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좋았고, 그 도전이 귀했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사했습니다. 실패가 아닌 시도를 다시 할 생각입니다.
20. 언젠가 나누겠지만 제게는 올해 평생 추억에 남을 만한 소중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잘 가꾸어 올 수 있음에 감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21. 애정하는 형님이 개척한 개척교회에 다녀올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해 볼 수 있어 마음이 좋았습니다
22. 사랑하는 후배의 결혼식에 잘 다녀왔습니다. 그와 제수씨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제 일처럼 행복했습니다. 그가 얼마 후에 저희 집으로 놀러 오기로 해서 마음이 들뜬상태입니다. 하루속히 만나 가족 단위로 더욱 가까워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23. 최근에 우크라이나, 일본, 미국인 모녀와 만나는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캐나다에서 소중한 동생 부부가 방문을 해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모녀는 내년에 한국에 방문하면 저희 가족과 다 같이 만나자고 먼저 말해줄 정도로 친밀한 대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든 시간이 감사했습니다.
24. 제주에서 찍었던 스냅사진을 커다랗게 현상해서 걸어 두었습니다 기쁨 이에게 그 사진을 보며 제주를 추억하라고 했더니 싱긋 웃고 지나갑니다.
25. 출간 작가의 꿈을 놓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면 어느 날 제 책이 세상에 나오겠지요. 기쁨 이가 자꾸 언제 그 책이 나오냐고 질문하는 덕에 더 노력을 해야겠지만, 반드시 나오게 될 거라는 말로 기쁨 이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 속에서 주님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그동안 기다려 주신 애정하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제 마음이 참 행복합니다. 돌아올 수 있는 마을이 있어서, 동구밖에 나오셔서 저를 꼭 마중해 주실 것 같은 따뜻한 분들이 이곳에 많이 계셔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기쁨 이의 큰절로 제 마음을 대신해 드리고 싶습니다. 기쁨 이의 큰 절 퍼레이드 보시고 아이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제 8시가 되었네요
하루의 시작입니다. 모두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기쁨이와 저희 부부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아프신 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