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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트 김 May 30. 2023

청어잡이의 혁신 - 네덜란드의 역사를 바꾸다


최근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고, 여기에 영문위키피디어의 History of Nethelands, Herring, Herring buss 등을 검색하여 보충하였다.



<청어(Herring)는 어떤 어종인가?>


청어는 색깔이 푸른색이라 청어로 불린다. 이 물고기는 우리나라 연근해 및 서부태평양에도 분포하며, 특히 유럽에서는 북해, 북극해 등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유럽에서 인기 있는 생선중 하나였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주로 북유럽 국가, 즉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3국, 영국 등에 많이 잡히며 중세시대부터 유럽인들에 의해 널리 애용되는 음식이었다. 주로 소금식초절임을 해서 장기 보관해 두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예부터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청어(herring)


11~13세기 무렵 네덜란드 어부들은 근해 연안에서 청어를 잡아 왔다. 잡힌 청어는 해안으로 가져와 내장을 발라내고 소금물에 저장했다. 그리고 식초까지 추가하여 이른바 소금식초물에 절이는 청어가 가장 흔한 요리방식이다. 소금과 식초를 넣은 물에 절인 청어를 영어로 soused herr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어부들이 청어 무역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북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청어잡이는 아주 흔한 업종이었다.


soused herring(소금과 식초를 넣은 물에 절인 청어)



<가공처리방법의 혁신>


그런데 14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혁신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어부들이 새로운 청어 가공방법을 개발해 낸 것이다. 청어는 배 속에 유문수라는 작은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서 소화를 돕는 효소가 분비된다. 내장을 완전히 제거하는 대신 이 유문수와 췌장을 남겨둔 채 염장하면 신선도가 훨씬 오래 유지되며 덤으로 맛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양으로 진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선박을 제조>


그 이후 네덜란드 어부들은 더 많은 청어를 잡기 위해 인근 연안에서 벗어나 북해 먼바다까지 나갔다. 북해 한가운데 도거뱅크(dogger bank)라는 비교적 얕은 해수역이 있었는데, 그곳은 은빛청어가 떼로 자리하고 있는 어장이었기 때문이다.


Dogger Bank의 개략적 위치(출처: 영문위키피디아)



그러나 먼바다로 나가려면 기존의 배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선박이 필요했다. 1416년, 암스테르담의 북쪽 마을 호른(Hoorn)의 선박제조자들이 선체가 길고 양옆이 볼록해 내부가 널찍하며 아주 튼튼해서 거친 바다에서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배를 만들어냈다. 그와 함께 선상에서 곧바로 청어의 내장 제거와 소금 건조 등의 가공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의 구조도 개선하였다.


이렇게 해서 거친 해상에서 청어잡이를 할 수 있는 청어잡이용 쌍돛어선이 탄생했다. 이제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를 잡자마자 곧바로 귀환하는 대신, 5주 이상을 바다에서 계속 고기잡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네덜란드 항구로 귀환할 때는 소금절임한 청어를 가져왔고, 그 청어들은 1년 정도 보관이 가능했다. 게다가 옛날식으로 건조한 것보다 맛도 훨씬 좋았다.


네덜란드의 청어잡이용 어선(herring buss)



네덜란드 어부들의 청어잡이는 인근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십 년 만에 네덜란드는 유럽 청어시장을 장악했다. 몇 톤에 달하는 청어를 폴란드와 프랑스, 라인강을 따라 독일까지 수출했고, 멀게는 러시아까지 내다 팔았다.


<원양업의 발전>


네덜란드 어부들이 청어를 잡으러 북해 먼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어업 경영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근해어업은 가업 수준의 노동력이면 충분하지만 원양어업은 분야별 인력, 일정규모의 자본, 항구접안 등 기반시설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래서 선박의 규모와 기능이 확대, 다양화되었고, 인력의 경우도 항해사, 내장 빼기 등 가공전문일꾼(노련한 내장 빼기 팀은 시간당 2,000마리의 청어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포장하는 사람 등 분야별 전문인력도 구축되었다. 이른바 인력 전문화다.


<해적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해군함대의 지원>


더욱이 청어잡이 선단이 값나가는 화물을 싣고 있으니 해적들의 공격에 대비하는 해군의 지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청어잡이 상인들은 네덜란드 주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주정부는 선단을 보호할 해군함대를 지원하였다.

한 척의 해군함정이 네덜란드 청어잡이 선단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The Autch herring fleet, C. 1700, escorted by a naval vessel). 출처: Wikipedia, "Herring buss"



<청어잡이업무의 표준화, 규격화>


주정부는 얼마 후 고기잡이와 청어의 손질, 판매까지를 아우르는 규정도 제정했다. 이는 상품의 품질을 유지하고 모든 가공청어의 품질을 동일하게 유지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청어잡이 규모가 대폭 확대되자 주정부는 청어를 담는 통의 크기 등 형식을 통일하고 통의 겉면에 ‘홀란트 청어’라는 도장을 찍도록 하는 규정도 마련했다. 요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상품의 규격화, 통일화, 라벨링 등의 업무관행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청어산업이 최고 절정기에 달했을 때 홀란트주의 어부들은 1년에 약 2억 마리를 잡은 것으로 기록에 전해진다.


<조선업의 발전>


청어잡이가 계속 돈을 벌어들이자 어선의 개량에도 착수하였다. 청어잡이용 어선을 만들기 위해 독일에서 목재를 들여와 목판으로 가공하였다. 암스테르담의 제재소에서는 풍차의 회전운동을 톱날의 왕복운동으로 바꾸어 주는 크랭크축이라는 기계를 발명해 냈다. 기계로 제재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생산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렇게 해서 암스테르담 제재소의 목판재 가공생산비용이 크게 낮아졌다.


목판재비용은  선박 생산원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 따라 네덜란드 조선업의 경쟁력이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잉글랜드의 조선업계에서 네덜란드 목판재 수요가 급증했고, 목판재 자체의 수출도 크게 증가했다.


네덜란드 조선업계는 이제 원양을 항해할 선박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종국에 네덜란드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무역업의 발전>


한편 조선업의 발전과 함께 무역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각지를 돌며 수집한 정보가 풍부하였다.


이 때문에 세계 무역상들 사이에서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정보통으로 통하게 되었다. 나아가 돈이 될만하다고 생각되면 아무리 먼 지역의 사정이라도 돈을 주고 알아냈고, 이렇게 알아낸 정보에 따라 매번 다른 화물을 싣고 나갔던 것이다.


예를 들면, 유럽 남부지역의 농작물 수확량이 형편없이 감소하자 발트해의 단치히(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로 청어잡이를 갔던 암스테르담 출항선들은 호밀과 밀을 가득 싣고 돌아왔고,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 배들은 폴란드의 곡물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판매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가서는 와인을 싣고 발트해로 돌아왔고, 독일에서 가져온 맥주도 네덜란드에서 소비되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 남부, 즉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에 속한 안트워프(Antwerp), 겐트(Gent), 브루게(Brugge) 지역은 향신료와 희귀 직물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얀판 에이크 등 플랑드르파 화가들이 르네상스미술의 일부분으로 칭송받으며 번창해 나갔다.


16세기 향신료 무역루트(출처: Wikipedia)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업의 선진국으로 발전>


종합해 보면 르네상스문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 조각에 착수하고 코페르니쿠스가 본격적으로 천문학을 파고들기 시작했을 무렵 암스테르담은 활기찬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와 더불어 일찍부터 개신교는 물론 유대교도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푸는 정책을 취함에 따라 능력 있는 개신교/유대교 상공업자들이자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암스테르담은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 유대교 등 모든 이교도들이 수용되면서 유럽은 물론 멀리 중동, 아프리카로부터 배에 상품을 가득 싣고 몰려드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 Duyfken호



그러나 이때까지도 네덜란드는 아직도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그냥 홀란트주, 제일란트주 등 각 주단위 자치제로 운영되면서, 당시 유럽의 강국이었던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는 어느덧 해상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1648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이루게 된다. 청어잡이의 혁신이 그 시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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