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계약서는 안 썼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그 사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불특정 다수가 보는 브런치의 특성상 다 밝힐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고, 혹시라도 내 글을 기다려오신 독자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6월 초쯤 수습기간이 끝났다. 언제 3개월을 다 채우나 싶었는데, 정신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다 보니 100일 가까이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우리 회사는 따로 수습평가를 공개하거나, 따로 불러 어떤 코멘트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냥 할당되는 업무가 수습 계약기간 이후까지 있길래 '뭐지?'하고 있다가 어느새 6월 중순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회사의 일원이 되는 듯했다.
25살. 아직 같은 직무의 팀 안에서는 내가 제일 어린 나이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막 성장하는 스타트업이고, 몸집을 크게 부풀리기 위해서는 업무의 시작부터 가르쳐야 하는 신입보다는 경력직 신입, 아예 경력직을 원할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입사한 이후로 같은 직무로 입사하시는 분들은 다 다른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거나, 최소 직무와 관련된 인턴까지는 경험하고 오신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일주일이 걸렸던 사전 교육도 하루 만에 패스하고 실무에 투입되더라. 나의 부족함이 눈에 확 보이는 순간이기도 해서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3개월 차도 오래 머문 사람이 되는 환경에서, 누군가가 보기에 나는 배울만한 점이 있는 사람인가 싶어 걱정만 더 늘어난 것 같다.
수습사원일 때는 언제든 불려 가서 해고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사수들의 눈치만 봤고, 그분들이 아무 말 없어도 무서워했다. 지금도 눈치 보고 무서워하는 건 있지만, 이제는 내 업무 역량이 부족한 것만 같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그래서 최근 퍼포먼스 마케팅 수업도 듣기 시작했고(벌써 일주일치 수업이 밀려있지만), 카피라이팅 책도 샀다(읽다가 말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대놓고 나를 괴롭히거나, 밤에 전화해서 업무를 지시하거나, 피드백 과정에서의 모욕적인 언행을 하는 분이 마케팅팀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롯이 내가 할 일에 마음만 먹으면 집중할 수 있다. 스타트업의 장점, 나이 때가 젊은 구성원들로 이뤄진 회사의 장점은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정말 부조리한 일이 아니고서야 회사에 대한, 사람에 대한 불만은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빠의 암이 전이됐고, 엄마는 안 계시고, 형제자매는 취업은 했지만 나보다 늦게 회사에 들어갈 예정이고. 그래서 나는 일단 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한다. 전 직장에서 한 달 만에 나온 이력은 마이너스면 마이너 스지 절대 좋게 작용할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회사에서 더 오래 버텨야 한다. 커리어라고 내세울 게 없어도, 내 근무기간이라도 내세우기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다. 부디 이런 내 생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쓰다 보니 많이 비장해졌는데 아무튼 한 직장에서 근속하고 싶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