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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믐 Aug 02. 2022

졸피뎀, 그 아찔한 부작용에 대하여①

복용 6개월이 지난 지금

※주의※
본 내용은 절대 졸피뎀을 비롯한 수면제의 복용을 권장하는 내용이 아님을 밝힙니다.
모든 항정신성 의약품은 처방받기 전 의사 선생님과 충분한 상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복용 전 : 내가 알던 내가 아냐


관용어 중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이 있다. 딱 내가 그랬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병원에 가기까지 2달~3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내가 업무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콘텐츠 마케터로 입사하였으나, 6개월 후 직무 전환되어 퍼포먼스와 프로모션 진행 등 좀 더 포괄적인 범위의 마케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없었고, 남들보다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직무 변경 후 처음 두 달은 출퇴근길에서 그냥 눈물이 흘렀다. 질타를 받은 날에는 마스크가 젖는 걸 아랑곳 않고 울면서 1시간 30분 거리를 퇴근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뒤떨어진단 열등감이 너무 커져 불안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떤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날 발견했다. 이미 답을 들은 질문을 또 물어보고, 팀장님께 혼나는 와중에도 내가 어떤 부분으로 혼나는지 인지하기 힘들었고, 그 순간의 서러운 감정만 기억했다.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회의가 많이 잡히는 월요일이 너무 싫어서, 일요일 저녁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적게 잘 때는 1시간~2시간만 잤다. 출퇴근길이 너무 고단하고 피곤했지만, 내가 들은 말은 위로보다는 현실적인 조언일 때가 많았기에 그냥 참아봤다. 얼추 참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공적으론 직무가 바뀌고, 친한 동료들이 퇴사하여 마음이 심란했으며, 잘하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적으론 아빠가 아팠다. (이건 내 브런치의 다른 글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는 내 가정사다) 아빠는 암이 재발한 뒤 투약된 항암제가 몸에 맞지 않아 고통스러운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끔찍했다. 회사도, 가족도, 어느 것 하나 나를 위로하기엔 벅차고 무거운 존재들이었다. 그 무거움 들을 견디다 결국, 나는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다. 


사실 나도 아프니까 좀 봐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졸피뎀 복용 : 첫 처방은 10mg


세상에 마음 아픈 사람들은 왜 그리 많은 건지. 정신과 예약을 잡으려니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원래 성격 같으면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스스로도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10월에 두드린 정신과 문은 11월이 되어서야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다들 마음에 감기가 들었구나,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은 엄청 살가운 분이셨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편하게 말해도 될 내 증상을 어떻게든 조리 있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더 이상 무어라 설명하기 힘들어 '잠이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것저것 내가 겪는 증상을 알아내기 위한 질문들을 거듭했고, 나는 성실히 답했다. 


"아빠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서 힘들어요."


그리고 돌아온 처방은 수면제의 처방이었다. 먹게 될 당시에 나는 내가 무슨 약을 먹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냥 자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지 않고 아주 푹 자고 싶었다. 그래서 수면에 도움을 주는 약이 처방된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정말 꿈에서만큼은 불안 없이 자고 싶었으니까.


너무 늦은 시간에 드시진 마세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주의사항이었다. 그런데 먹기 시작하니 그 말이 딱 필요했다. 10mg가 졸피뎀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용량이라고 들었는데, 사실 알약 크기만 봐서는 이것만 먹고 잘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확실히 약은 약이었다. 잠드는 게 곤욕스럽던 나날이 무색하게 복용 후 30분 즈음이 지나자 졸음이 몰려왔고 까무룩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긴 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복용 후 7~8시간 정도 간격을 둬야 한다고 돼 있던데, 그럼 나는 출근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3시간 통근러에게 7시간의 수면은 복에 겨운 말이었다. 야근이라도 한 날엔 집에 일찍 와도 자정이었고, 그런 날엔 약을 먹을 수 없었다. 못 일어날까 봐. 어쩌다 일찍 퇴근해서, 어쩌다 씻고 밥 먹고 났을 때 기분 좋게 10시~11시쯤이 되었을 때, 먹을 수 있었다. 안 그럼 아침에 눈을 뜰 수는 있는데, 몽롱한 상태로 지하철을 타야 했다.  


무섭지 않은 졸피뎀


종종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내 추측으로는 약이 다 깨지 않은 상태에서 출근하곤 했다. 약으로 버티는 것 같아 소위 '현타' 올 때도 많았지만, 아프기 때문에 먹어야 했다. 나는 내 마음이 아픈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말한 한 달의 기다림 끝에 정신과 문을 열었을 시기, 나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내 손가락질을 할 것이라 굳게 믿었고(사실 요새 또 그렇다), 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로를 살인하거나, 회사의 상사분들이 돌아가며 내게 소리 지는 꿈도 자주 꿨다. 나는 꿈속에서 가해자가 되고, 방관자가 되고, 끔찍한 장면 한 반복 재생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간혹 꿈이 너무 생생해 회사라는 공간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약물치료를 받아야 했다. 회사에서 내가 감정조절을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졸피뎀이라는 어쩌면 무시무시한 이름도, 내겐 그저 필요한 '약'으로 다가왔다. 나름 성실히 때맞춰 복용하려 했고, 가장 고질병이었던 수면장애를 고치고 싶었다. 내 간절함은 꾸준한 약물치료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복용 중이니 이루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나는 말로만 듣던 졸피뎀의 부작용을 겪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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