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오늘 아침을 알리는 소리다. 숙소 천장이 낮은 것을 잊어버리고, 일어나자마자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샤워를 하면서 19년 마지막 날은 이런 숙소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시설도 그렇지만 마지막 날은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즐겁게 보내고 싶었다. 숙소 로비로 가서 사장님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 숙박은 환불하고 싶은데요..." 경주 오릉을 친절하게 추천해주던 사장님 표정이 심란해 보였다. 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장님은 원래 당일 환불은 안되는데 반값만 환불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취소한 나의 책임도 있으니 반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았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도로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했다. 숙소에서 나와 고분들 사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은 시설도 좋고, 파티도 하는 최고의 숙소를 예약하겠다는 마음으로 '경주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했다. 하지만 19년 12월 31일 빈자리가 남아있는 숙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예약 가능한 숙소는 내가 방금 환불하고 나온 숙소 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놀러 온 친구가 서울에 있는 조계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말이 많은 친구라 답답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오히려 답답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친구의 추천으로 기회가 되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미루다 보니 오늘까지 왔다. 그래서 오늘이 기회라는 생각으로 불국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홈페이지 구석에 '템플스테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12월 31일, 마지막 날을 기념으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1) 당일인데 예약할 수 있을까? 2) 한자리는 남아 있겠지!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다. 담당자 번호로 전화를 했다. 통화연결음이 끊어지도록 응답이 없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문자를 남겼다. "혹시, 오늘 템플스테이 참가할 수 있을까요?" 도저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거운 짐을 들고 고분 주위를 뱅뱅 돌았다. 어제는 그렇게 재미있던 경주 풍경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을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전화 한 통이 울렸다. 불국사 템플스테이 담당자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담당자는 마침 예약을 취소한 가족이 있어 한 명이라면 템플스테이를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후 1시까지 불국사역으로 픽업을 하러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날을 절에서 보내게 되다니. 여행을 출발할 땐 상상도 못 했던 여정이다. 콩닥콩닥 설레는 마음으로 불국사로 향하는 기차를 타러 갔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북극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군집을 만드는 펭귄들처럼. 사람들도 무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하기 위해 군집을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군집 안에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의 체온이 느껴졌다. 혼자 덩그러니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월! 월!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트램 모양의 캐리어를 끌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소리의 방향을 보니 캐리어 안에 강아지가 있는 것 같았다. 강아지가 우는 소리에 연인들은 참지 못하고 캐리어 위에 있는 작은 숨구멍을 열어줬다. 그러자 그 사이로 불독이 고개를 쏙~하고 내밀었다. 나는 추워서 어디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불독은 밖으로 나오지 못해 안달이 났다. 그런 불독을 보고 연인은 싸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잠깐만 안아서 달래주자고 말했고, 남자는 한 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말렸다. 불독은 또 얼마나 똑똑한지 촉촉한 눈으로 여자 주인만 바라봤다. 마음이 약해진 여자는 불독을 들어 안았다. 남자는 답답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고 다시 집어넣으라고 화를 냈다. 여자는 다시 불독을 집어넣어보려고 했지만, 불독은 수영이라도 하듯 네발을 사정없이 움직이며 발버둥을 쳤다. 그 순간 불국사로 가는 기차가 들어왔다. 남자는 빈 캐리어를 들고, 여자는 불독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불국사역에 도착해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이번엔 바로 답장이 왔다. "지금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불국사역은 테이블이 2-3개 정도 있는 동네 카페 정도로 크기가 작았다. 편의시설은 매표소, 자판기, TV 그리고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역이나 터미널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매점이나 국숫집도 하나 없었다. 그럼에도 역이 해야 하는 역할은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불국사역은 100년이 넘도록 매일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여행을 선물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나도 새로운 여행을 선물 받은 사람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불국사역을 둘러보고 있는데 강아지 목줄을 발견했다. 경주역에서 본 불독의 목줄 같았다. 허겁지겁 목줄을 들고 불국사역을 나갔다. 100m 떨어진 곳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연인들이 보였다. "저기요~"하고 큰소리로 불러보지만 돌아보질 않았다. 그제야 뛰기 시작했는데, 50m 정도 갔을 때 연인들은 택시를 탔다. 다행히도 택시는 신호에 멈춰 대기를 했고, 나는 택시 창문을 두드렸다. 톡톡. 연인들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연말 깜짝 선물이라도 보여주듯 목줄을 잡고 흔들었다. 연인들은 창문을 내리고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여행 즐겁게 하세요."하고 말하고 다시 불국사역으로 돌아왔다.
불국사역으로 흰색 스타렉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검은색 후리스에 형광 패딩 조끼를 입은 중년 남성이 내렸다. 본인을 템플스테이 담당자라고 소개하는 중년 남성의 파마머리를 보니 스님은 아닌 것 같았다. 스님은 수행으로 바빠서 템플스테이를 진행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한 나를 보고 프로그램 중간에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잘하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고 말해줬다. 간단히 담당자님과 인사를 나누고, 담당자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불국사를 소개하고 설명해주실 테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담당자님"라는 호칭이 부르기 불편했다. 선생님은 나를 스타렉스 구석 자리로 안내하고, 누군가와 전화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2명이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스타렉스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같이 템플스테이를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드디어 스타렉스는 불국사를 향해 출발했다. 차를 타고 산길 오르는데 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등산을 좋아해서 소나무라면 질리게 봤지만, 도로 양옆으로 정갈하게 심어진 소나무는 생소했다. 마치 소나무로 만든 터널을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필름 카메라로 소나무길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말했다. "비 오는 날 아침에는 소나무의 가지들에 빗방울이 맺히는데요. 꼭 열매가 맺힌 것만 같아요." 잠시 동안 필름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선생님이 말한 비 오는 날 아침이 펼쳐졌다.
선생님의 도착했다는 말에 내려보니 불국사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물어보니, 불국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을 위한 숙박 시설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관은 불국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었다고 설명했다. 대신 숙박을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은 불국사에서 진행하니 안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자연산 뽀글이 파마를 하고 덩치가 큰 청년이 앉아있었다. 나를 보고 인사를 하는데 두꺼운 뿔테 안경을 뚫고 귀여운 눈웃음이 치고 나왔다. 오늘 나의 룸메이트였다. 이 청년은 내게 먼저 환복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곱게 접힌 절복을 가리켰다. 나는 절복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절복 바지는 세상에 통이 얼마나 큰지 가만히 있어도 나풀거렸다. 그래도 두꺼운 면으로 만들어져 내복을 입지 않아도 웬만한 칼바람은 막아줄 것 같았다. 절복 상의는 '불국사 템플스테이'라고 적힌 노란색 조끼였다. 안감은 비늘 재질로 되어서 입고 벗기는 편했지만, 두께 자체가 얇아서 안에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다. 절복을 입고 나니 나도 제법 절 사람 같았다.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룸메이트와 인사를 나눴다. 룸메이트의 이름은 범승이고, 서울 강남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서울 잠실에 산다고 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알고 보니 범승이는 나보다 2살이 어리고 지금은 MEET라는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학교를 다니면서 잠시지만 MEET를 공부해볼까 고민했고, 주위 친구들이 많이 도전을 했던 터라 얼마나 어려운 시험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범승이도 2번을 도전했고 내년이 마지막 도전이라고 했다. 불국사는 마지막 도전에 대한 굳은 다짐을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는 범승이의 눈에선 이미 합격이 보였다.
"템플스테이 참여자분들 모두 202호로 오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와, 202호로 들어가니 템플스테이 참여자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족히 20명은 넘는 것 같았다. 온 가족이 같이 온 참여자들도 있었고, 친구나 연인과 함께 온 참여자들도 있었다. 모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똑같은 절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참여자들을 모두 앉히고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본인은 스님은 아니지만 불교(부처님의 가르침)를 사랑해서 불국사 템플스테이 담당자로 일하고 있고, 세상에 불국사의 가치를 알리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진심 어린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시큰둥하던 참여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선생님의 자기소개가 끝이 나자 참여자들은 박수를 쳤다. 나는 선생님을 처음 만나 스님이 아니라고 실망했던 일이 생각나서 남들보다 박수를 두 배는 크게 쳤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선생님은 두 가지 사찰 예절에 대해 설명했다. 먼저 불국사에서 스님이나 다른 사람을 만나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하라고 했다. 절에서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하는 행위는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했다. 그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은 꼭 가지런히 놓으라고 당부했다. 절에서는 신발이 곧 정신상태를 의미한다고, 신발이 흐트러진 사람은 정신이 흐트러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 두 가지만 명심하면 언제든 사찰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며 참여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선생님을 따라 불국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에 위치한 불국사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했지만, 사람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잘 닦여 있었다. 올라가는 길 모퉁이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보였다. 흐르는 물 위로는 갈색으로 변한 단풍들이 떠내려갔다. 당장이라도 힘차게 흐르는 물에 손을 넣어 한 모금 들이키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날씨에 손을 넣었다간 동상에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참았다. 산을 오르다 보니 잔잔한 물 위로 놓인 돌다리를 하나 발견했다. 돌다리 위에는 오후의 햇살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반대로 돌다리 아래는 물에 반사된 돌다리가 산들바람이 만든 파도 덕분에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놓치고 싶지 않아 맨 앞에서 출발했던 내가.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새 꼴찌로 밀려났다. 아니 꼴찌는 아니었다. 내 뒤에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 놓고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한참 앞을 보니 가족들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빨리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뒤를 보니 할아버지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먼저 가라고 말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할아버지는 비탈길을 오르는데도 호흡이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을 들어 올리는 무릎에는 힘이 느껴졌다. 비록 할아버지의 발걸음은 참여자 중에서 가장 느리긴 해도 누구보다 가벼워 보였다.
불국사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사찰 순례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무슨 절에 방문을 하든 먼저 가야 할 곳은 '대웅전'이라고 말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절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불국사 입구로 들어가니 탑이 두 개 보였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석가탑 그리고 오른쪽에는 다보탑이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10초도 보지 않고 지나갔던 탑들을 오늘은 10분을 넘게 보고 있었다. 단순히 국보로 지정이 되어서 아름답다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통일신라 시대부터 보존된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느껴져다. 다보탑은 크게 3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1층은 네모난 모양으로 만든 돌을 촘촘하게 쌓았다. 2층은 햇빛과 바람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4개의 기둥만 올렸다. 마지막으로 3층은 사각형, 사다리꼴, 팔각형, 원형 등 다양한 모양의 돌탑들이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게 만들었다. 화려한 다보탑에 비해 석가탑은 비교적 단순하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네모난 박스와 뚜껑을 반복해서 올리고 마지막은 양꼬치로 장식을 한 것 같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둘은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탑들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스님들이 고민이나 걱정이 몰아칠 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저녁 공양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템플스테이 참여자들이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니 제법 길었다. 공양을 먹고 나오는 스님들에게 합장을 하고 인사를 했다. "조금 불편하실 테지만 그래도 잘 봐주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스님들에게 말을 전했다. 그런데 내 속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스님이 합장하고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성불하세요."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성불이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라는 뜻이었다. 스님들의 일상에 침범한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오늘 저녁 공양으로는 떡국이 나왔다. 멸치도 없이 소금으로 우린 국물에선 슴슴한 맛이 났고, 떡은 얼마나 잘 익었는지 몇 번을 씹어도 쫀득거렸다. 숟가락을 떡국에 넣고 휘휘 저어 온도를 일정하게 맞췄다. 고개를 수그리고 그릇을 살짝 들어 국물을 마시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다시 숟가락을 들고 오늘 담갔다는 겉절이를 떡국 위에 올려 먹는데 행복이 밀려왔다. 사실 공양은 채식 위주라고 걱정을 했는데, 그릇에 붙어있던 건더기까지 긁어먹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덜덜덜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불국사는 정말 추웠다. 절복을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무릎까지 시렸다.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선생님은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를 보고 말했다. "이제 몸 좀 녹이러 법당으로 이동할게요."
법당은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두꺼운 양말을 신고 있는데도 발이 시렸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모아서 걸어보지만 소용없었다.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방석을 나눠주면서, 6명씩 무리를 만들어줬다. 방석에 앉아 엉덩이 아래에 발을 넣고 있으니 그나마 조금 나았다. 그런데 갑자기 찬 바람이 들어왔다. "따뜻한 메밀차 한잔씩 드시죠." 주전자를 들고 있는 여자가 들어왔다. 선생님은 절에서 비구니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학생보다는 메밀차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학생이 종이컵에 메밀차를 한 잔, 두 잔 따르는데 법당에 달콤한 메밀향이 맴돌았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일어나 메밀차를 가지고 왔다. 나는 방석에 앉아서 발을 녹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메밀차 가져다 드릴까요?" 나는 최대한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네, 제발요..."하고 말했다. 우리는 메밀차를 계기로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연주는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하며, 옆에 같이 온 친구 영민이도 소개해줬다. 새로운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연주와 달리 영민이는 낯을 가리는 것 같았다. 성격은 조금 달라도 둘이 농담으로 핑퐁 치는 걸 보면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궁합이 잘 맞았다. 연주와 영민이와 같이 프로그램을 들으면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연주가 가져다준 메밀차는 텁텁한 입안을 달달하게 만들었고, 코 끝을 맴돌던 구수한 향은 여운이 오래갔다.
갑자기 법당에서 피아노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둥절해진 사람들은 선생님을 쳐다봤다. 선생님은 마이크를 들고 불교의 목적이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옮겨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명상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선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붙여 500원 동전만 한 동그라미를 만들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눈을 감고 선생님이 하는 말에 따라 호흡을 했다. 3초 동안은 입으로 숨을 뱉고 다음 3초 동안은 코로 숨을 들이셨다. 신기하게도 입과 코에서 호~흡~하는 소리가 났다. 단순한 호흡을 반복하니 가슴에 박힌 답답함이 조금씩 쓸려내려 갔다. 선생님은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흘려보내라고 말했다. 하나의 생각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호흡을 방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다 선생님은 숨을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아보라고 했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곳곳에서 헥헥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뱉고, 쉬기를 반복해서 몸이 호흡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상황에서 숨을 갑자기 참으니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명상을 종료하고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호흡하고 살아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아시겠죠?" 정말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신비로운 명상이 끝나고 연꽃등 만들기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연주와 영민이는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반면 손재주가 없는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선생님은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컵 벽면에 꽃잎을 풀로 칠해 붙이다 보면 어느새 연꽃이 될 거라고 설명했다. 말로는 무진장 쉬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만들어보니 연꽃잎 하나를 제대로 붙이기 위해선 손이 풀 범벅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있지도 않은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 다른 꽃잎들 간의 간격과 균형을 맞춰야 했다. 남들은 연꽃잎을 거침없이 붙이는데 나는 꽃잎 하나 붙이는데 1분이 넘게 걸렸다. 그런 나를 보고 연주와 영민이는 얄밉게 놀려댔다. "오빠, 오늘 다 만들 순 있어요?" 나는 똥손으로도 아름다운 연꽃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만들었다. 결국, 연꽃등을 만드는데 장장 한 시간이 걸렸다. 비록 오래 걸리긴 했지만 같은 무리에 있는 사람들도 칭찬을 할 정도로 괜찮은 연꽃등이 만들어졌다. 연주와 영민이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구경을 했다. 연주의 연꽃등은 꽃잎들 간의 간격이 균일했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시원하게 피어있었다. 칭찬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연주였다. 그런데 영민이가 만든 연꽃등은 배추 등 같았다. 연꽃잎을 보라색도 아니고, 분홍색도 아니고, 초록색으로 붙였다. 풀잎을 장식할 용도로 준비된 초록색 연꽃잎을 몸통에 붙이니 싱싱한 배추가 탄생했다. 나는 영민이의 어깨를 톡톡 치고 말했다. "혹시, 배추 만든 거예요?" 영민이는 고개를 흔들며 내게 미적 감각이 없다고 화를 냈지만, 연주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연꽃을 들고 제야 타종식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제야의 종 앞에는 승복을 입은 스님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보였다. 선생님은 제야 타종식이 불국사에서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행사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누구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누구는 부모님의 병의 쾌유를 위해, 누구는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누구는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누구는 나처럼 호기심으로 왔을지도 모른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행복한 다음 해를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기 위해 불국사에서 제야의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정확히 11시 30분에 큰 스님이 마이크 앞에 섰다. 나는 동네 주민들이 만들어준 붕어빵을 양손에 들고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큰 스님의 말씀 중 내 마음에 내려앉은 한 문장은 지금도 외우고 있다.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되도록 하라." 짧지만 오래도록 곱씹고 싶은 문장이다. 큰 스님의 말씀이 끝나고, 19년 23시 59분 50초부터 사람들은 큰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0, 9, 8, 7, 6, 5, 4, 3, 2, 1, 0. 20년 00시 00분이 되는 순간, 불국사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렸다. 불국사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큰 스님, 일반 스님, 불국사 관련자들이 종을 차례대로 치고 나니 일반인들도 종을 칠 수 있게 해 줬다. 아니나 다를까 연주와 영민이가 나타났다. "오빠! 종 치러 가요." 서울 지옥철만큼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서울 지옥철만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연주와 영민이와 같이 재미있는 상상을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종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으면 어떡하지?" "종을 칠 때 충격이 전해져서 손이 아프진 않을까?" 그러다 보니 벌써 우리 차례가 왔다. 나는 종을 치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먼저 종을 친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있는 힘껏 줄을 당겨 봉으로 종을 쳤다. 그 순간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앞으로 마주할 행복들이 태동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사진을 부탁했던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며 인사를 하고 휴대폰을 받아서 내려왔다. 부푼 마음으로 사진을 확인하는데 다들 머리통이 날아갔다. 사진을 부탁받은 사람이 얼마나 손을 떨었는지 구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우리는 반으로 잘린 사진 덕분에 템플스테이관으로 돌아가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5시 반에 일어났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아 몸만 일으켜 욕실로 갔다. 욕실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는 찬바람이 들어왔고, 수도꼭지는 아무리 돌려도 미지근한 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잠이 달아났다. 절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거실로 나가니 범승이가 있었다. 범승이에게 어제 만난 영민이와 영지 이야기를 하고, 오늘 괜찮으면 같이 일출을 보자고 물어봤다. 범승이는 싫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영민이에게 석굴암에서 만나자로 문자를 보냈다. 범승이와 나는 선생님의 차를 타고 석굴암 입구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3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아침 6시에 산은 등불 말고는 보이는 게 없었다. 앞사람도 잘 보이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걸어야 했다. 공기는 정말 상쾌했다. 산에 있는 풀, 나무, 바위, 낙엽을 스치고 몸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산뜻한 맛이 났다. 몸이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등불을 따라 꼬불꼬불한 산행길을 걸으니 시야가 트이는 평지가 나왔다. 템플스테이를 참여자들이 모여있었다. 선생님은 평지에서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석굴암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일출을 감상하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각자 무리를 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연주와 영민이가 인사를 했다. "오빠들 안녕하세요~" 내 옆에 있는 범승이도 고개로 인사를 했다. "이쪽은 나랑 같은 방 쓰고 있는 범승이야."라고 소개하니 범승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출까지 10분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우리는 간단히 인사만 하고 전망이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앞에 나무가 있어 전망을 제대로 보긴 힘들었지만,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은 곳이었다.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할아버지도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사진 촬영 버튼 위에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언제든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태양이 지평선을 넘어 올라오니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찰-칵! 찰-칵!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영상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도 보였다. 영상 통화 화면을 보니 가족들이 있었다. 남자는 일출을 카메라로 담아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마이크에 대고 계속해서 따뜻한 말을 전했다. 비록 지금은 석굴암에 혼자 있지만, 새해의 소망을 담은 일출만큼은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내게도 전해졌다.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 일출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도 보였다. 2020년 1월 1일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일출의 순간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범승, 연주, 영민이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 표정에는 사랑, 기대, 희망 등 하나 같이 행복한 감정들이 묻어났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선생님이 명상을 끝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정한 행복을 찾으면 부처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