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해 작년을 되돌아봤다. 나는 작년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느꼈으며, 그로 인해 무슨 변화가 있었지 추억하면 지금 내 기분까지 좋아지는 일도 있었고, 떠올리면 코 끝이 찡해지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작년이라는 365일의 시간이 지나고 내게 남은 건 바로 '사랑의 확장'이다. 재작년의 나는 사람만 사랑할 줄 알았다면, 작년의 나는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도 사랑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대상과 사랑에 빠진 건 황칠나무다. 황칠나무를 만난 건 작년 가을 어느 토요일. 그날은 날씨가 정말로 애매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산책을 나갈 수도 없었고, 날씨가 나쁘지도 않아서 집에만 있기에도 아까운 날이었다. 무얼 할까. 어딜 갈까. 침대에 누워 반나절을 고민하다 집 근처 농원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외출하면 혼자 외롭게 집을 지키고 있던 몬스테라에게 친구가 필요한 터였다. 그렇다고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은 식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넓은 농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농원은 전시가 잘 되어 있는 꽃집과 달랐다. 종류, 크기, 색깔이 다른 식물들이 규칙 없이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식물을 발견하기 위해선 발품을 팔아야 했다. 발걸음은 천천히 눈동자는 빠르게 굴리면서 농장을 돌아다니는데, 유럽에 있는 빈티지 시장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 이거 좀 재미있는데?
그러다가 황칠나무라는 보물을 발견했다. 줄기는 세상 가느다란 주제에 하늘을 찌를 듯 멋지게 뻗어 있었고, 잎은 오리발 모양을 하고서는 줄기 윗부분에만 슬쩍 돋아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황칠나무에게 반해버렸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무한한 황칠나무의 자신감을 옆에 두고 매일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황칠나무를 집으로 데려왔고, 샤워실로 들고 가 잎을 닦아 주었다. 생각보다 잎에 묻어 있는 먼지를 닦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게 닦으면 잎이 찢어질 수 있고, 약하게 닦으면 먼지가 닦이지 않았다. 그렇게 중간 세기로 잎을 열심히 닦고 있는데, 샤워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황칠나무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정말 황당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순 없었다. 나는 황칠나무에게 우리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햇살 명당을 양보했고, 매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황칠나무에게 물이 부족한지, 많지는 않은지 흙을 체크했으며, 힘든 일이 생기면 황칠나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건 도저히 사랑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두 번째는 전기 자전거다. 나는 집에 있는 것만큼 밖에 있는 것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자주 가는 곳은 마트, 서점, 공원이다.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들이기 때문에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최근에 몸이 많이 아파서 자전거를 타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외출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 전기 자전거다. 당장 차를 살 돈은 없고 그렇다고 오토바이를 사자니 위험해 보였다. 그에 비해 전기자전거는 100만 원 이하로 저렴하고, 엑셀을 아무리 댕겨도 최대속도는 25km로 제한되어 있어 안전하게 탈 수 있었다.
전기 자전거를 사기로 결심하고 당근 마켓을 열심히 뒤졌다. 처음부터 전기자전거와 사랑에 빠졌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 중고로 구매한 전기자전거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하루라도 빨리 가지고 싶어서 특별한 심사 없이 구매한 것이 패착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전기 자전거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그제야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 브레이크는 녹이 슬어서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자전거 차체에도 녹이 슬어서 붉게 변한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었지만 일주일만 더 타보자는 마음으로 정을 주려고 노력했다. 일주일 동안 전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정말 편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가 자동차는 하차감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는데, 전기자전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전기 자전거에서 내렸을 때, 사람들이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샀던 중고 가격에 10만 원을 낮춰 전기 자전거를 팔아버렸다. 돈도 돈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에 정을 붙이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내가 정말로 마음을 줄 수 있는 전기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 가격, 성능, 디자인, 하차감까지 모든 심사에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자전거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매일 당근 마켓에 들어가 전기자전거로 검색을 하다가 나중에는 전기자전거를 키워드 알림으로 등록해서 상시로 올라오는 물건들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단무지 색 전기자전거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왁!!" 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심사를 통과하고도 남을 만큼 마음에 드는 전기자전거였다.
판매자를 만나러 가는데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혼다에서 자랑스럽게 발표한 전기자전거를 내가 타게 되다니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평점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다시 호구처럼 눈퉁이를 맞기는 싫으니 말이다. 속도 계기판은 정상적으로 잘 표시되는지, 스마트 키는 문제없이 잘 작동하는지, 차체에 녹이 슬거나 부서진 곳은 없는지, 브레이크는 잘 잡히는지, 주행 시 불편한 점은 없는지... 판매자가 귀찮을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확인을 했다. 다행히도 차체에 지저분한 얼룩이 많이 묻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았다. 그렇게 단무지 색 전기자전거를 집으로 데려왔고, 황칠나무에게 했던 것처럼 전지 자전거도 열심히 닦아주었다. 전기자전거는 닦으면 닦을수록 광이 났다. 광이 나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제야 날씨가 좋으면 어김없이 세차를 하러 가는 친구들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나는 한 번도 집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집을 잠자는 곳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자는 것 외에는 모두 밖에서 하고 싶어 했다. 작업할 일이 있으면 카페에 갔고, 밥 먹을 때가 되면 식당에 갔다. 술을 먹고 싶으면 술집에 갔고, 책을 보고 싶으면 서점에 갔다. 그런데 원룸에서 투룸으로 집을 이사하면서 대부분의 활동을 집에서 하기 시작했다. 작은방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작업공간, 큰방은 비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쉬는 공간으로 분리하니 집에 오래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다. 거기다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까지 배치하고 나니 집은 아늑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고, 나는 그 분위기에 취해 처음으로 집이라는 공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요리도 했다. 요리를 하면 온갖 국물들이 주방으로 엄청나게 튄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사랑스러운 주방에 국물들을 오래 방치해서 얼룩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리를 하면서 동시에 열심히 주방을 닦았다. 물론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설거지를 쌓아두지 않고 바로 처리했다. 집을 사랑하게 되니 정말로 청소를 열심히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청소도 매일 아침 했다. 하루 동안 집안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먼지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청소기로는 먼지를 흡수하고, 흡수되지 않은 얼룩은 물티슈로 힘을 주어 닦아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쓸모에 의해 이동된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나면, 어제보다 오늘 아주 조금 더 집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람 말고 다른 대상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한 해다. 이 생각의 변화는 내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작년에 시작된 황칠나무, 전기자전거, 집과의 사랑을 시작으로 올해는 사람, 사물, 공간 등 존재의 형태에 상관없이 더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랑이 가득한 새해를 열어본다.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