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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 Jan 09. 2023

'나는 관대하다. 그러므로 관용한다.'

관용

학과 교수님의 블로그를 탐방하다 발견한 책으로, 평소 가지던 문제의식과 닿는 점이 있어 구매해 읽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용'은 '다문화주의' 앞에서 필수적인 시민 교양이나 도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렇게 교육되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순수도덕'의 외양을 한 관용이 실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의 하나라는 것을 재발굴하고, 자유주의적 규율사회의 통치성의 '대리보충'으로서의 관용의 효과에 주목할 것을 역설한다.

철저한 정교분리의 '라이시떼(laicite)'와 같이 프랑스(혹은 근대 시민사회)를 상징하는 4대 정신이라 일컬어지는 '똘레랑스(tolerance)'지만, 실은 라이시떼로부터 파생되는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역사는 종교 안팎의 모든 문화적 요소를 정교분리식의 '세속화', 혹은 '비정치화'한다는 것. 저자는 이러한 효과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이라고 본다.

저자는 관용의 탈정치적 효과에 주목한 다음 이것이 어떻게 권력의 통치성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한 후, '유대인'과 '여성'의 사례를 비교하고 '동성 결혼'과 '이슬람'을 통해 구체적인 예시들로 들어갔다가, '시민적 교양'의 전리품으로 '전시되는 관용'의 과시적 성격을 보고, 이를 통해 '우리'와 '야만'을 구분하는 정신분석학적 기제를 훑어본 뒤 이것이 어떻게 문명이 재생산되는(하는)지를 서술한다. 여러 복잡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단적인 예시들을 통해 현대 문화 세계를 둘러싼 관용의 문제들을 가볍게 추려볼 수 있다.

가령,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과 같은 표현이 압축하는 바는? 한때 한국문화에서 유행한 이 표현이 암시하는 사회구조는 거의 모든 섹터에서 반복해서 재현할 수 있다.

"교수가 허락한 학생회"
"사장이 허락한 노동조합"
"유럽이 허락한 유대/아랍"
"미국이 허락한 중동/히스패닉"
"백인이 허락한 흑인"
"러시아가 허락한 돈바스...?"

"A가 허락한 B"

현실주의의 측면에서 A는 B를 허락하지 않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관용하는 자는 관용받는 자에게 한계 지어진 '반쪽짜리 관용'을 선사해왔다는 것이다. 이때의 관용은 '진정한' 관용인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 과연 '진정성'이 문제의 본질인지 되물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차이에 의한 갈등이 필연까진 아니더라도 특정 담론 지형에서 더 높은 개연성 하에 발생하며 이때 어떤 갈등들은 '당연한' 것으로 볼만하다. 갈등의 발생가능성을 얼기설기 추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놓은 현대 사회과학 앞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적어도 갈등을 없는 셈 치거나 선심 쓰듯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갈등가능성을 직면하고 최악을 방지하기 위해 봉합할 방안을 찾는 부단한 노력의 태도일 것이다. 때로 불의에 항거하는 목소리가 시끄럽고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사실'이고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닥치라'라고 하는 목소리가 항존한다는 것 역시 '사실'로서 인지하라는 것.

불관용의 관용이 관용의 불가능성을 감싸 안을 때 가능한 '한계 없는' 관용. 역설적으로 '진정한' 관용을 가능하게 하는 '불가능한 관용'을 위해 관용비판서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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