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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템포 Apr 16. 2021

제주로의 도피,

넉넉한 여행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부터,

일단 끊으면 뭐라도 시작됩니다
그래도 날씨요정님이 도와주신 비행


나는 실은 꽤나 이것저것 따지는 사람이다.

날씨며 숙소며 최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 집념에 시작도 하기 전에 질려버리곤 한다.

게다가 정보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는다. 치열한 게으름뱅이랄까.


머릿속의 계산에 어느 정도 질릴 때쯤이면 결국 뜨거워진 머리로 질러버리는 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

비행시간이 짧아 한두 푼 아껴보려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적당한 시간대에 있는 비행기를 골랐다.

호텔과 게스트하우스, 에어비앤비를 열심히 보다가 결국 친구가 묵은 숙소 중 느낌이 좋은 곳으로 예약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왜 늘 심사숙고하는지 모를 일.


내 기준 여행의 팔 할은 숙소와 교통편이기에 큰 걱정 없이 휴가를 내고 짐을 챙겼다.

단출한 옷가지에 아이패드, 책, 그리고 이것저것 쓸 노트.

그다지 많이 챙기지 않은 것 같은데도 캐리어가 가득 찼다. 과연 내 욕심의 무게란.


이번 여행의 테마는 온전한 휴식.

수첩을 들고 다니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냥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사람이 될 계획이었다.

관광지며 맛집이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유일하게 목표로 한 것은 제주 바다에서의 서핑뿐이었다.


장롱면허라 운전도 못하는 나는 이번 여행도 뚜벅이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횡단을 할 계획도 없고 제주의 동서 쪽이 어떻게 다른 지,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문외한이라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컸다.

여행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따지고 싶지 않은 나의 스타일을 철저히 고수하기로


그리고 늘 이런 사람에게는 여러 에피소드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출발부터 발생했다.


그래 문제는 미루는 거지

그리고  문제는 그걸 어떻게든 해결을 한다는 거지.


국내선은 타볼만큼 타본지라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한 시간 정도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한 시간이면 내 기준 아주 넉넉한 시간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고 실상은 나와 같은 생각으로 모여든 여행객으로 북적였다.

짐을 부치는 것은 물론 게이트를 통과하는 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비교적 줄이 짧은 바이오 게이트를 이용하려 했지만, 이름이 영문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사실 영문 이름이 문제가 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한 번 게이트를 지나갈 수 없어 한글 이름으로 재발급을 받아 비행기를 탔는데 그러고서 다음에 바꾸지 뭐, 혹은 다음에도 창구에서 티켓을 받지 뭐.라는 안일한 심산으로 있었던 것.


부랴부랴 뛰어내려 가 모바일 티켓을 보여드리며 종이 티켓으로 발급을 받았는데, 직원분께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영문으로 표를 발급해주신 것.

역시나 영문으로 발급된 티켓으로는 게이트를 지나가지 못했고 이번에는 ‘진짜 못 타겠는데?’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캐리어를 전차같이 끌며 다른 직원분께 숨도 쉬지 않고 현 상황을 설명드렸고, 비행기 시간을 들은 직원분께서 소속을 급히 마쳐주셨다.

종이티켓을 발급해주신 분은 아무래도 공항의 시스템을 잘 모르시는 듯했다.

제가 왜 모바일을 종이로 또 뽑겠어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의 게으름을 누구에게 탓하랴 싶어서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냅다 뛰었다.


위기상황에 인간은 초인적인 힘을 낸다고 하는데 내 꼴이 딱 그러했다.

꽤나 무거운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고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필 탑승구는 가장 먼 곳에 있어서 숨결에서 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달렸다.


그 와중에도 공복 운동은 제대로 하는 군.이라는 생각과, 나라는 인간은 어쩌면 이런 상황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1분 컷으로 탑승 완료.

내 문제는 항상 사고를 치고 어찌어찌 해결한다는 것이다.

아 어찌어찌 해결하는 것도 능력인가?




따뜻한 집

온기가 있는 쉼의 공간


체크인 시간보다 빨리 숙소에 도착했다.

BMW(Bus, Metro, Walk) 중 운 좋게 버스와 튼튼한 두 다리의 힘을 빌려 길을 잃지 않고 도착.


버스에서 아무 이미지가 없는 도화지에 풍경을 채워 넣듯 제주의 순간순간을 담았다.

우선 날이 너무 좋았고, 나의 숙소가 있는 곳은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작은 마을이라 더 좋았다.

이곳저곳 유명한 곳에 가는 것보다 그곳에서 직접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보며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내게는 큰 즐거움이자 여행의 이유니까.


게다가 더 좋았던 것은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열자마자 느껴진 따뜻한 온기였다.

잘 정돈된 호텔의 느낌과는 분명 다른, 누군가의 생활의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

사람의 온도 정도 될 것 같은 따스한 볕의 채도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목조와 꽃무늬 패턴이 어우러진 그런 분위기.

마치 누군가의 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짐을 두고 당장이라도 눕고 싶었지만, 양심상 바다는 보러 가자 싶어 책과 태블릿을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복잡한 마음

흘려보내야 하는 걸 알지만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정리하고 싶다, 는 것도 강렬한 욕구라 오히려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에 방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원래 생각이란 하면 할수록 많아지는 속성이라 다른 것에 집중하거나 일상을 바꾸는 것이 상책.

그래서 여행이 조심스러운 이 시국에도 제주에 온 것이다.


마을을 걸었다.

양파를 말리는 집, 빨래를 널고 있는 집, 생활도구들이 즐비한 마당.

왠지 마음이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반가움인지 경계인지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멍멍이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좋고,

나지막한 건물 덕분에 하늘이 탁 트이게 보이는 것도 좋았다.


목적지가 없어서 그냥 정처 없이 걸었다.

조금 걸으면 에메랄드 바다가 나온다. 몇몇은 패들보트를 타고 있었고 몇몇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열심히 노를 휘젓던 누군가가 아주 시원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바다에 빠지는 모습은 저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마음마저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분은 물을 좀 먹고 분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한참 맛있는 곳을 찾아보다가 결국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문이 열려 있었고, 술을 팔았기 때문.

선택의 이유는 언제나 단순하다.



신선놀음

 책과 와인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이것이 제주바이브

큰 기대 없이 들어온 이 곳에서 소비뇽 블랑을 만났다.

나와 같이 혼자 온 사람이 많아서인지 신의 계시인지 하프 바틀을 판매하고 있었고 큰 고민하지 않고 소비뇽 블랑을 주문했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기본으로 나오는 땅콩과 바다를 안주삼아 마시기로.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을 읽고 얼마 전 촬영한 프로필 사진의 보정 본을 골랐다.

누군가 대신 골라줬으면 마음이 들 정도로 조금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무 일정도 없고 딱히 바라는 것이 없어서 마음이 바쁘지 않았다.


홀짝홀짝 한두 잔 와인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와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진짜 내가 마신 것 맞나? 찬바람을 맞으니 취하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혼 여행에 지리도 익숙하지 않아 취기가 오르면 마시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풍경을 앞에 두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다시 카운터로 향했다.

헨켈을 시키고 저녁으로 숯불 닭꼬치도 주문했다.

얼마나 책을 읽고 자랑용 사진도 찍으니 주방 쪽에서 자그맣게 서비스를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두 바틀을 마신 것이 머쓱하기도 했지만 서비스를 주신다면 감사히 받는 것이 인지상정.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곧 직원분께서 감사의 선물로 음료를 만들어주신다고 하셨다.

제주에 왔으면 한라봉을 먹어야지, 싶어 한라봉 에이드를 부탁드렸다.

달달하고 시원한 맛이었다.


곧이어 화이트 초콜릿과 함께한 감귤칩도 선물로 주셨다.

나란 사람은 이 곳에 또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밤바다와 노을

송이 구름의 찬란한 연소의 순간

해가 지기 시작하자 숙소로 가야겠다 싶어 짐을 챙겼다.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저무는 하루가 아쉽고 붉게 물드는 하늘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느낌이 강해서일까.


붉다, 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오묘한 하늘의 빛깔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아이를 데려온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하늘을 보았다.

같은 하늘을 보며 우린 모두 무슨 생각을 할까.


살짝 오른 취기와 반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결을 가다듬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깜깜한 밤을 지키는 우리의 늠름한 친구.


돌아오는 길은 조금 무서웠다.

아무도 없어서 나 하나쯤은 저 양파밭에 묻힌다고 해도 모를 듯한 기분.

괜히 노래도 따라 부르고,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해서 걸었다.

후다닥 돌아온 숙소 내 방은 여전히 따뜻했고 침구는 포근했다.


잠들고 싶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또 킬링타임 영상을 보다가 폰을 덮었다.

잠자리가 예민한 편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인지 달게 잠들었던 제주의 첫 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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