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츠 온천에서 온전한 몰입의 경험,
도쿄에서 차로 약 4시간 정도 떨어진 쿠사츠 온천.
한 여름의 온천은 상상도하기 힘든 한국의 습하고 뜨거운 여름에 떠난 여행이었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떠났기에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청명한 하늘과 여름을 머금은 진한 초록의 산을 지나며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풍경의 그림자까지 섬세히 그려낸 이유를 온 감각으로 느끼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온도의 숫자가가 믿기지 않았지만, 창문을 열자마자 서늘하고 시원한 공기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산 특유의 서늘함과 목욕탕 특유의 촉촉하면서 향기로운 비누의 향이 나는 곳. 때때로는 유황의 철철 끓는 냄새를 만날 수 있는 동네였다. 마치 목욕을 위해 태어나고 만들어진 것 같은 장소에서 손발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담겨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간 해오던 일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여러 변인과 또 내안의 기질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더는 감당할 수도 감당해서도 안되는 순간이 왔기 떄문이다. 다시 되돌아 보면 쉼없이 달려온 시간 속에서도 유난히 상황에 휘둘리고 감정에 매몰된 시간이었다. 어느 경험이나 현재와 시간적으로 가까운 시간들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오랜 시간 축적되고 애써 외면해온 무거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내린 순간과 사건들은 내게 너무도 직접적이고 날카로웠다.
날은 뜨겁고 습했지만, 일을 쉬고 집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잠은 자도자도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쏟아지고 가만히 있어도 무언가를 하고 있어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았다. 머리를 말리거나 설거지를 할 때에도 드라마를 틀어놓거나, 책을 읽어도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아 같은 문단을 몇 번이고 읽었다.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게 하면 더욱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 지난 과거와 오늘의 내게 주어진 몇 가지 일들, 그리고 향후 알 수 없는 방향에 대한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무거워진 마음과 그와 함께 활기를 잃은 육신을 이끌어 온천에 몸을 담구었다.
여기서 바로 마음이 치유되었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피가 다시 돌며 몸의 온도에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 몸이 조금 따뜻해지고는 비로소 주변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목조의 무늬결, 물의 점성과 온천 특유의 향,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마음이 불안할 때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하는 온열효과가 도움이 된다는 글을 읽었는데, 이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조금은 시간이 걸렸지만, 묵었던 마음과 걱정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뭉쳐있던 근육과 명치 언저리 갑갑하리만큼 가득차게 갑갑했던 응어리들이 온천의 유황과 함께 바스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네의 크고 작은 목욕탕을 보며, 다른 테마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몰입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노천탕에 벌레가 있으면 어쩌지, 조악하게 가려진 가림막 사이로 누군가가 있다면?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파란 하늘과 살짝 차가운 공기, 그리고 뜨거운 온천물에 온 몸을 맡긴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될 특별한 순간임을 확신한다.
가끔 몸과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차갑고 굳어버릴 수 있다.
온천처럼 특별한 장소가 아니더라도, 몸과 마음의 온도를 조금 더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이런 순간들을 더 자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단단하게 굳어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