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행 끝에서

스페인은 처음이라

by 정담아

유럽은 처음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설렘보다 먼저 다가온 건 현실이었다. 먼 대륙으로 향하는 긴 비행. 10시간 넘도록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어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좁고 딱딱한 의자에서 잔뜩 웅크린 몸을 뒤척이는 불편함과 설핏 자다 깨는 따분함이 싫었다. 그 무료 속에서 유일한 낙은 먹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주어졌던 두 번의 기내식과 한 번의 간식, 그리고 동행의 요청으로 추가로 흡입한 프레첼과 컵라면, 맥주를 비우고 나니 지루한 시간들이 겨우 끝이 났다.


긴 시간 동안 닿을 수 없었던 지상에 발을 딛고 핸드폰을 켰다. 왠지 시간을 번 기분이었다. 어차피 여행이 끝나면 도로 뱉어내야 할 시간이지만, 매번 나를 제치고 먼저 달아나버리던 대상보다 앞서 나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미리 사온 USIM이 작동하지 않았다. 짐을 기다리는 내내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기계와 씨름하는 기분이란. 돈을 날렸다는 분함보다 인터넷의 혜택 없이 버텨야 하는 2주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이번 여행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나를 야무지게 약올리며 속을 태우는 내 것과 달리 순조롭게 일을 해내는 동행의 핸드폰이 든든했고, 온 정신을 핸드폰에 빼앗긴 내 옆에서 이것저것 찾아주고 짐을 둘러봐주는 동행의 존재가 위로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국땅에서의 적응을 마친 핸드폰을 확인한 후에야 내가 선 곳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밖으로 이동해 공항버스 줄에 섰다. 우리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우리가 선 곳이 과연 맞는가에 대해 자주 논했지만 그때마다 답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스페인은 처음이었고, 스페인어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영어와 알파벳이 유사하며 특유의 발음 몇 가지가 있다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한 줌의 스페인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낯선 발음과, 쏟아지는 언어들 속에서 무심하게 덜컹대는 짐칸 속 짐의 안전에 대해서. 그 모든 걸 싣고 달리는 버스가 향하는 우리의 목적지에 대해서. 그런 우리가 제대로 스페인의 풍경을 마주한 것은 공항버스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이국땅을 온전히 느낀 건 구글맵으로 숙소와 가까워진 현재의 위치를 확인한 뒤였다. 제대로 된 길 위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안도감이 낯선 땅에 내려앉은 서걱거림을 걷어내고 달뜬 설렘을 살짝 뿌려주었을 때, 그제야 진짜 스페인이 내게 다가왔다.


크게 화려하진 않지만 아직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거리, 제법 쌀쌀하지만 오싹하지 않은 찬 기운이 맴도는 공기, 바삐 서두름은 아니지만 즐거움이 듬성듬성 묻어나는 소란. 이게 내가 처음 느낀 스페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둑하지만 ‘맑음’으로 다가왔던 까만 밤하늘이 마음에 훅 들어왔다. 드르륵 드르륵-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 캐리어를 끌며 숙소로 향하면서 던지는 시선마다 걸리는 매력적인 건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골목들,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은은한 불빛에 마음을 빼앗겼다.

안녕, 스페인.

왠지 느낌이 좋았다. 금방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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