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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Nov 24. 2022

수포자의 영원한 첫사랑, 수학

감정이 말을 걸다 #셋

1년 만의 고백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툰 열일곱 여고생이 처음으로 그 아련함을 담아 장미 한 송이와 편지 한 통을 선물했다. 그의 책상 위에 마음을 놓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꾹꾹 눌러쓴 편지이건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설렘만 가득 안은 채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거짓말처럼 그와 이별했다.


그는 키가 작고 못 생겼다. 두꺼운 안경을 쓴 까만 얼굴의 그는 수학을 가르친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수포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문과생이니 수학이라는 과목과 안 친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조차 별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수학에 목숨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한 최선은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고운 심성을 지녔다. 수학을 전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로운 데라곤 없는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사람의 내면을 중시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반할 수밖에!


상위권의 성적이 나오는 학생이긴 했지만 수학만큼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어서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되는 게 내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수학의 원리를 이해하고 공식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부족했기에 수학은 그저 풀기 어려운 숙제일 뿐이었다.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수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수학 선생님이 아무리 좋아도 점수가 잘 나오는 건 별개였다. 수학은 다른 과목 점수로 간신히 커버할 수 있는 정도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수학 선생님이 너무 좋았지만 선생님의 눈에 띌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수학은 점점 어려워졌고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선생님은 점점 좋아졌고 선생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친구들 말로는 내가 좋아하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고 했다. 수학 시간마다 눈에 하트가 그려지는 학생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수업에만 집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좋아하는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니 아무리 감추려고 애써도 빵빵하게 타오른 하트가 친구들 눈에는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선생님과 따뜻한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대로 가다간 평생 후회할 일 리스트만 늘어날 것 같았고 근심만 쌓여갔다.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해야겠다!’

 

고백은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결코 우발적인 고백이 아니었다. 편지를 쓰는 데만 일주일 이상이 걸렸고 선물 목록을 만드는 데도 한 달이 걸렸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고백을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신중하게 편지지를 고르고 첫 고백이니 부담되는 선물보다는 장미 한 송이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결전의 날! 아침 일찍 교무실에 갔다.

교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며 그의 책상을 찾았다. 책상 가까이에 도착하니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수학 관련 서적들, 매일 그의 손길이 머물렀을 교무수첩과 펜. 그의 단정한 성격이 배어있는 공간에 와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일인가? 편지와 장미를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교무수첩 바로 옆에 나란히 놓았다. 편지를 놓았을 뿐인데 좋아하는 사람 옆에 나란히 선 것처럼 설렘 가득했다.


그날 2교시 수학 시간.

평소에 잘 웃는 사람이 아니지만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백을 한 게 수학을 못하는 나여서인지, 선생님께 고백하는 학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상한 건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무겁게 한 발 한 발을 떼어 교단에 오른 그의 얼굴을 보았다. 유독 더 나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서 있었다. 가슴 한편이 쓰려왔다.


‘고백을 하지 말 걸 그랬나? 결국 내 고백 때문에 저렇게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계속 침을 삼켰다. 짝꿍이 내 손을 잡아줬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근을 가게 됐어요. 늦게 말해줘서 미안해요.”


하늘이 무너지면 어떤 소리가 날까?

하늘이 무너지면 어떤 냄새가 날까?

하늘이 무너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날이어야 하고, 그의 미소를 볼 수 있는 날이어야 하고, 어쩌면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쌍방 고백의 날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다니… 이렇게 공식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하다니… 이렇게 공식적으로 나를 울게 만들다니… 울컥 눈물이 쏟아졌고 그 후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수학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선생님은 나를 제재하지도, 나를 혼내지도, 나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다음날, 선생님은 서울로 전근을 가셨다.

짐을 싣는 선생님을 아무 말 없이 도와드렸다.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차에 타기 전에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맙다, 봄아!”

출석을 부를 때 외에 그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 또 눈물이 흘렀다. 눈물 때문에 목구멍이 막혀 결국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냈다.


선생님이 떠난 후 난 다시 수포자가 되었다.

수학은 곧 좋아하는 선생님의 다른 이름이었지만, 수학을 공부하는 일은 별개로 여겨졌다. <수학의 정석>은 베개로 사용하고 수학 시간에 국어를 공부했다. 수학이 국어만큼 재미있었다면, 수학을 좀 더 잘해서 선생님의 눈에 진즉에 띄었다면 그가 떠나지 않았을까? 수학 시간에 그가 아닌 다른 선생님이 교단에 서고, 그가 그리울 때마다 수학시험을 망치는 꿈을 꿨다.


수학은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처럼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고 나를 못 살게 군다.


요즘 다시 수학책을 꺼내 들었다.

이번엔 어려운 수학책이 아닌 글로 된 수학책 <수학 귀신>이다. 이 책을 다 읽을 때쯤 수학과 나는 어떤 사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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