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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Dec 21. 2024

제철 다이어리

<생각 꾸러미>

겨울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차리는 나만의 신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뻑뻑한 눈을 공격하는 바람이 매서워졌다는 걸 몸으로 느낄 때다. 겨울바람은 손쉽게 눈으로 진입해 갈고리 모양을 하고 눈동자를 강하게 후벼판다. 공격을 받은 눈동자는 마치 피를 흘리듯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시큰한 느낌이 들어 눈가를 만져보면 어느새 눈물이 손에 묻어난다. 낫지도 않는 이놈의 안구건조증은 유독 겨울에 더 존재감을 내비친다.


또 다른 신호는 피부에서 감지된다. 평소에도 건조한 편인 피부는 겨울이 되면 더 생기를 잃는다. 촉촉한 로션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발라야 원래의 모습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몸 곳곳에 트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샤워를 하고 나온 후 간질간질한 기운이 피부를 감싸면 여지없이 겨울이 왔음을 실감한다. 내게 겨울은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특유의 겨울 냄새를 사랑한다. 코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바람. 겨울 냄새에는 바람의 단호함이 담겼다. 이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든다. 마치 자연 앞에 항상 겸손해지라는 명령처럼. 겨울의 바람은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계절다운 무게감을 보여준다.


겨울 냄새가 도시를 떠다닐 때면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한다. 뿌듯한 한 해를 보냈든, 그저 그런 한 해를 보냈든, 마음에 들지 않는 한 해를 보냈든 빼놓지 않는 일이다. 일 년을 되돌아보며 잘한 일에는 칭찬을, 못한 일에는 위로와 대안을 떠올린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기대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이어리를 쓰는 일이다. 거리에서 내년도 다이어리가 판매되는 모습이 보이면 올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다이어리를 사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지난날의 후회를 뒤로 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은 느낌, 삶의 의지를 다지는 순간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세운 계획을 모두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계획 세우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 주로 1월과 2월에만 바짝 쓰고 버려지는 내 다이어리가 매년 새로운 친구를 맞는 까닭이다. 내게 다이어리를 산다는 건 내년의 희망을 사는 일과도 같다.


올해도 연말을 맞아 다이어리 하나를 구매했다. 크기가 손바닥만 한 연보라색 다이어리다. 이 다이어리에는 2025년을 보내는 나의 자그마한 희망들이 기록될 예정이다. 그중 몇 개나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잘 살고자 하는 이유가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작은 의지들이 모여 하루하루를 풍성하게 하고, 다시 그 하루하루가 모여 일 년이라는 시간을 이루는 거겠지.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작은 다이어리가 더 이상 작지 않게 느껴졌다.


김신지 작가의 책 <제철행복>은 '제철'이 인간에게 주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봄에 쑥을 캐 먹는 일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제철 음식을 나누는 일, 절기에 맞춰 제 때 할일을 하는 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일년을 알차게 사는 비법'이다. 제철을 챙긴다는 건, 순간순간을 집중해서 사는 일이기도 하다.


"새해가 되면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가 한눈에 보이는 연력을 펼쳐두고 제철 행복을 적어두는 루틴이 생겼다. 그렇게 내 일상에 '기다려지는 일들'을 미리 심어두는 게 좋았다. 자연에 마음을 기울이고 계절에 발맞추는 것만으로도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인생의 질문은 결국 '나에게는 무엇이 행복인가'로 돌아오곤 했는데, 나의 행복은 자주 제철과 자연에 머물렀다."

"우리만의 연례행사가 생긴다는 건 1년이 더 자주 즐거워진다는 걸 뜻했다. 그로 인해 봄을 기대하고 여름을 기대할 수 있었다. "

                         <제철행복> 중에서


당신의 하루하루가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면 다이어리 쓰기를 조심스레 권한다. 본래 다이어리 쓰기의 제철은 겨울인 법이다. 만약 다이어리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서점이나 문구점을 들러 한 권을 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손과 귀를 얼릴 듯한 차가운 바람이 느껴질 때면 그때를 나만의 다이어리 쓰기 제철로 삼는 것도 좋겠다. 꼭 다이어리가 아니라도 달력같이 미래에 희망을 걸게 하는 어떤 것이라도 좋다. 제철에 다이어리를 쓰는 자신을 다독이며 올 한 해도 고생했다고 말을 건네면 그걸로 족하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겨울 냄새가 도시를 뒤덮는다. 찬 바람이 자유자재로 활개 치면서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복장도 점점 두꺼워지는 모양이다. 초록 생명들이 차디찬 겨울을 견디고 봄에 피어나듯, 권태와 좌절에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따뜻한 한 줌의 희망이 자라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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