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른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닿아 May 18. 2022

취미의 몫

서른에게 02

취미나 특기를 궁금해하는 물음은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왔던 것 같은데, 여전히 답하기가 어렵다. 요즘과 더 어울리는 말로 바꾸자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라 쓰는 게 더 맞겠다 싶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잘하는 것을 묻는 일은 주기적으로 해오고 있는데, 그걸 취미나 특기라고 부르기에는 또 어감이 다른 것 같고. 취미는 뭐랄까, 일의 경계선에서 벗어나 이유 없이 즐기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할 것 같잖아.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싶은 걸 떠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내 입장에서는 취미를 갖는다는 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더라. 뭐 좀 재밌는 게 생기면 자꾸 일을 벌이니까. 얼마 전에 나를 오래 봐온 친구를 만났는데, 걔가 나에게 취미가 없는 이유를 분석해줬거든. 다 너무 맞는 말이라 웃기더라. 


'너는 다른 사람들이 취미로 할 만한 걸 다 일로 하잖아. 사진을 좀 찍나 했더니 모델 일을 해버리고, 맥주를 좀 좋아하나 했더니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글을 좀 쓰나 했더니 일기를 써서 메일을 보내버리고.'


오늘만 해도 인스타툰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협업 제안을 했거든. 이미 혼자 하고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들이 많아서 내 안에서 가짓수를 더 늘리기에는 벅차고, 일전에 함께 일을 해본 친구라 잘 맞춰가며 만들어가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거든. 함께 꾸리는 프로젝트에서 오는 책임감과 강제성이 조금 그립기도 한 것 같아. 글작가를 할테니 그림작가로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어봐두었어. 나 웹툰 보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적고 보니 이거야 말로 취미다 싶네. 그저 내 시간을 쓰게 되는 것. 근데 인스타툰을 만들면 또 취미가 아니게 되겠지? 취미의 몫을 조금 남겨둬야 할까. 일만 벌이고 수습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야. 친구한테 답이 와봐야 아는 일인데 오늘도 혼자 열심히 고민부터 늘어 놓는다. 


 뭐 여튼, 그렇게 별다른 취미랄 게 없는 삶을 산 지 꽤 오래됐어. 여전히 그렇게 지내니?  운동에 어느 정도 재미를 붙이고 나서는 운동을 취미라 답한 적도 몇 번 있지만, 사실 운동은 재밌기 이전에 내가 해내야 하는 부분이라, 조금만 마음이 멀어져도 금방 스트레스로 다가와. 건강을 위해서도 있지만, 아무래도 언제 촬영이 들어올지 모르니까. 식단도 운동도 하면 좋은 것 이전에 해내야 하는 몫에 먼저 들어가 있어. 그래 놓고 맥주를 그렇게 마셨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운동이라도 하는 게 어디야, 그치. (ㅋ ㅋ) 너는 요즘 어떤 맥주를 가장 즐겨마실지 궁금하다. 새로 찾은 기깔나는 술이 있니? 좋아하는 맥주 냉장고에 쟁여둘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참 좋겠구나. 그거라면 꽤 괜찮은 삶이지.  


새로 일을 시작한 곳에서는 천천히 적응 중이야. 근무 시간 중에 해야 할 일이 많지는 않아서, 이렇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시간이 꽤 많이 확보가 돼. 그렇게 하기를 권유받기도 하고. 파트타이머로 있기에는 꽤나 가성비가 좋은 공간이랄까. 이제 이틀 차라 일하시는 분들과는 아직 데면데면하지만, 그래도 반겨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이내 친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맥파이를 떠나와야 하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그곳에서 직원을 하지 않는 한 안정적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일하는 동안 질 좋은 맥주는 자주 접하고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덕분에 매력적인 이들도 몇 알게 되고, 녹사평에서 경리단길까지 걷는 출퇴근 길도 매번 기분 좋았던 것 같아. 아직 두 번의 근무가 남았지만 그래도 이미 마음은 작별인사를 다 해버렸네. 원래 그렇잖아. 그만두기로 생각한 순간부터 작별이지. 몸만 오가다 남은 시간이 끝나 버려.


방금 전에 고등학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말이지. 유월 초에 학교로 와서 고1 친구들에게 전공 관련 설명을 해줄 수 있냐고 물으셔서 얼결에 그러겠다고 했는데 이거 정말 막막하네? (ㅋ ㅋ ) 벌써 고등학교 졸업한 지 내년이면 10년이 된다는 게 엄청나다. 내가 그들의 전공과 진로 선택에 있어 좋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 대학교를 그렇게 열심히 다닌 편은 못되는데 말이야. 더군다나 졸업하고 산발적으로 하고 있는 일들이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모양이 그들에게 어떻게 가닿을까 싶구. 재밌겠다 뿌듯하겠다 반에 걱정된다 반의 마음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있어. 고등학교가 삼청동 대문을 지키다가 저 멀리 수서역 쪽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나서는, 좀처럼 가볼 일이 없었는데 겸사겸사 가서 선생님들 얼굴을 뵐 수 있다는 건 좋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게 된 것도 좋고 ! 낯선 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건 참 오랜만이겠어. 내 이야기 중 한 문장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싶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만 남아도 그 순간은 값지다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하거든. 어떤 말은 오래 남아서 고된 순간마다 꺼내 읽게 되기도 하니까. 뭐 대단한 걸 이야기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갈 생각은 없지만, 그 친구들 삶 속의 50분을 공유하는 입장에서 적어도 재미라도,, 있으면 좋겠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조금 전 이곳에 와서 첫 전시 관람 손님을 받았어. 이곳에서는 별이 수놓아진 밤하늘과 풀벌레,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시골의 밤 풍경 같은 것들이 천천히 오래 반복되는 영상 전시를 하고 있거든. 첫날에 들어가 앉아 있어 봤는데, 멍하니 있기 좋더라. 오래 바다를 보고 있는 기분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게 좋았어. 한 달 반 마다 새로운 기획으로 전시를 하신대. 다음 주에는 다음 달에 있을 전시에 쓰일 영상 촬영을 할 겸, 그리고 회식 겸 해서 다 같이 양양에 가기로 했어. 뭔가 급진적으로 일이 막 전개되는 기분이지만 ㅋ ㅋ 덕분에 콧바람 쐬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이만 마감하러 가야겠다. 또 편지할게 !


_오월 십팔일의 닿아


매거진의 이전글 가끔 살고 자주 사라지고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