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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20. 2019

낙엽 다섯,
따뜻하게 반짝이는 도시 (1)

괜찮을 거야, 아이슬란드잖아


“오케이? 아 유 오케이?!”


“아임 오케이… 유 오케이?”


“오케이! 아유 오케이?”


우리는 차가 구르기를 멈추자마자 일제히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피가 났다 거나 어디가 부러졌다 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차는 넘어져 꼼짝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왼쪽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위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가 되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에리카는 문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그녀는 거듭 괜찮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놀라서 펄떡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빨리 거기서 나가기로 했다. 사고 난 차가 폭발을 일으킨다 거나 하는 영상이 머리에 떠올라 겁이 났지만 침착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하늘 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탈출해야 했다. 금이 간 유리창 밖으로 눈발이 새게 몰아치고 있었다. 문은 충격을 받아 찌그러진 탓인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운전석에 있던 아키와 에리카가 힘을 모아 앞문을 힘껏 밀어낸다. 힘겹게 열린 문을 향해 한 명 한 명 차례로 기어올랐다. 누워있는 의자를 딛고 구멍 밖으로 몸을 들어 올리니 작은 우박과 눈발이 날려 사정없이 뺨을 쳤다. 


바닥이 꽁꽁 얼어 있어 차가 미끄러진 것이었다. 당황한 아키는 핸들을 좌우로 흔들며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새게 밟은 브레이크 때문에 오히려 차가 좌우로 크게 요동치다가 빠르게 길 한쪽으로 밀려났다. 길 가장자리는 가드가 없는 비탈길이었고, 그 경사를 따라 차체가 나뒹굴고 만 것이었다. 다행히 언덕이 그리 가파르지 않아 차가 한 바퀴 정도를 돌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차도, 하늘도, 도로도, 도로가 아닌 땅도 모두 하얬다. 굵은 눈발이 우리를 눈사람을 만들어 버릴 듯한 기세로 내리고 있어 우리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덩달아 머릿속도 새하얘지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추웠다. 외투를 차에 두고 온 탓에 이가 덜덜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온몸이 떨렸다. 아키는 렌터카에 전화를 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힘없이 쓰러져 있는 차는 뒤집혀 일어나지 못하는 작은 벌레 같았다. 이 생경한 장면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를 펄펄 신나게 했던 차는 거센 자연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아무 쓸모도 없는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차가 이 지경인데도 내 몸에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에리카도, 아키도 멀쩡했다. 


패닉의 터널을 빠져나와 다행이야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이제 어떡하지 터널이 나타났다.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며, 망가진 차는 어떻게 보상하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게 될까? 최악의 경우, 여행을 계속하는 건 고사하고 어디서 큰돈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험차량이 오리라고 했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허벌판에 지나는 차도 드문 곳, 어딘가 무서운 세계에 빠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사이 몸은 더욱 차가워졌고 머릿속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내 인생에 벌어진 최악의 사고가 가장 오고 싶었던 아이슬란드에서 벌어지다니. 지금껏 나를 괴롭혔던 장애물들은 생각지도 못 한 순간에 나를 비웃듯이 나타나곤 했다. 그 거대한 파도는 내가 용을 써봤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나를 덮칠 뿐이었다. 


“괜찮을 거야. 아이슬란드잖아.”


귓가에 주술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에리카였다. 순간 차가운 살갗에 그녀의 진심이 따뜻하게 퍼져 나갔다. 무엇이 어떻게 괜찮은 지 설명한 게 아니었다. 확신이 아닌 위로. 그것은 ‘잔뜩 겁을 먹고 있는 내가 괜찮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등과 어깨를 감싸 안아주는 그녀의 팔은 아주 단단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딱딱하게 굳어가던 마음이 웨하스처럼 바스러졌다.

 

마음이 전달되는 속도. 

말로 전달되는 마음은 소리의 속도만큼 빠르고, 눈빛으로 전달되는 마음은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닿아 있을 땐 지체 없이, 바로  전해진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내 감정의 빨대에 그녀의 위로를 밀어 넣자, 그 끝에 있던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가 조용히 밀려나 사라졌다.






눈 결정은 닮은 낙엽



눈 속을 달리던 거대한 트럭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일단 구조차가 올 때까지 이 안에 있도록 해.”


지나는 차들이 하나같이 길을 멈추고  물었다.

“괜찮아? 내가 도울 일은 없어?”


렌터카 직원은 우리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그는 사고 처리를 다 마친 후에 배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슬란드의 땅 모양이었다.

“아이슬란드를 기억해줘. 그리고 또 와.”


이상하리 만치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말을 하고, 따뜻하게 뭉치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체득한 것일까. 


- 살얼음으로 덮인 길, 얼어 있는 호수, 날리는 눈발과 구르는 눈덩이, 거대한  눈 산.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 아이슬란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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