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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하나,
느리게 살아도 좋다 (3)

할아버지의 장수 비결


언젠가 유럽여행을 하면 꼭 이카리아섬에 가서 장수 할아버지들을 만나리라 마음먹었다. 할아버지들은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한 소녀가 티비에서 우연히 당신들을 보고 팬이 되었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만의 티비 스타였다. 엘튼 존도, 휴 그랜트도, 엘리자베스 여왕도 아닌, 섬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할아버지들. 길게 산다 거나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하다 던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길게 사는 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 본질은 다른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함께 향유하는 문화나 습관, 가치관 같은 것이 아닐까. 


키리코스 선착장 근처의 카페에 들렀다. 안은 고즈넉하고 나른했다. 좁은 창문 사이로 낡은 햇살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풀썩하고 몸을 움직이자 오래된 가죽의자에서 잠자고 있던 먼지들이 떠올랐다. 먼지는 붕 날아서 햇살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기분전환을 한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구운 마시멜로마냥 테이블에 나른하게 엎드렸다. 눈을 감고 귀로 주변을 훑었다. 카운터에서 나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천장에 달린 선풍기 날개가 시익시익 하고 돌아가는 소리, 창 쪽에 앉은 할아버지 손님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라디오를 작게 틀어 놓은 어느 주말의 휴일 같았다. 

할아버지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일상을 엿듣고 있자니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 볼까?‘


하지만 막상 다가갈 생각을 하니 망설여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이방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티비 스타가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다가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나는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안녕? 너희 모두 친구들이야?”


할아버지들의 테이블에 다가가 밝게 인사했다. 역시 영어는 반말을 하는 기분이라 장벽이 낮다는 생각을 하면서. 막상 다가갔지만 할아버지의 대답이 떨어지기까지 혼자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폐를 끼친 건 아닐까, 어르신들은 외국인에게 보수적일 수도 있는데… 심장 요정들이 벽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콩콩댔다. 

드디어 할아버지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다 동네 친구들이야. 너도 마찬가지고!” 


‘아싸!’ 하고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로서 나의 티비스타, 장수 할아버지들 사이에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아 오손도손 타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05살, 얘는 103살, 얘는 99살이야. 우리 다섯 명 다 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그러니까… 한 백 년을 서로 알아 온 거지. 허허허.”


상상도 못 한 할아버지들의 나이에 입이 쩍 벌어졌다. 나이도 나이지만 백 년을 넘게 한 마을에서 지냈다는 것도, 백 년 된 친구사이라는 것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백 년 동안 알아 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집 담장을 넘으면 매일같이 거기에 친구들이 있었겠지. 꼬꼬마 시절에 함께 모여 장난을 칠 때도, 몸이 자라고 생각이 자랄 때도,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갖게 되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또 같은 터널을 지날 때도 이들은 함께 였다. 인생의 슬픔이나 좌절도 함께 했겠지.

 

“우리 엄마는 117살까지 사셨다고.”


사바스 할아버지가 너스레를 떨며 말해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117이란 숫자가 이 시대의 사람에게 가능한 나이란 말인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어르신들이 껄껄 웃었다. 


백년지기 친구들이 일상처럼 모인 곳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정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한 시간지기 친구인 나도 금세 스며들었다. 마침 내가 가지고 있던 터키의 전통악기 덕에 우리의 흥은 최고조에 달했다. 사바스 할아버지의 즉흥연주! 우리는 카페에서 박수를 치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티비 스타의 라이브 무대까지 감상했으니 이제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노래도 부르고 했더니 피곤해. 낮잠을 자러 가야겠어.”

느닷없이 스테파노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 다섯 시인데요?”

나는 한창 얘기하던 중에 일어난 것이 뜬금없기도 하고, 잠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기도 해서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뭐 대수냐는 듯 답했다.


“그게 뭐? 졸리니까 자야지. 지금도 삼십 분은 걸어가야 한다고.”


“삼십 분이나 걷는다구요? 집이 여기서 그렇게 멀어요?"


"그럼, 매일같이 걸어서 여길 온다고"


"아하, 이곳 사람들이 건강한 이유를 또 하나 알았네요.”

그가 떠난 자리, 이곳의 장수 비결 중 하나가 떠올라 물었다.


“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늦잠 자는 것'도 장수 비결 중 하나라던데 정말 그래요?” 


이어지는 사바스 할아버지의 답에 나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것을 안 것만 같았다. 이 섬 사람들이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 이들 삶의 기저에 있는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늦잠이라, 이곳 사람들이라고 모두 늦잠을 자는 건 아냐.  

나는 염소랑 고양이한테 밥 주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걸?

사람마다 달라. 그런 거 아닐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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