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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Oct 24. 2022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치

미국에서 nurse로 새로운 시작 4

라스베이거스에서 처음 종합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사실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놈의 영어였다.  병원의  시스템이 다르다거나  처음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등은 이미 생존이 목적이 사람에게는 극복 가능한 두려움이었다. 문제는 어설프게 배운 영어, 그 언어라는 것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기본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깊이 있는 대화나 긴 영어, 특히 문화와 관련된 대화를 할 때면 늘 길을 잃고 헤매곤 하는, 하지만 딱히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누구의 말처럼 미국 드라마를 눈이 빠지도록 시청하거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건 절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암튼 나는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 용기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에 

'그래, 뭐 매일도 아니고 perdiem(일용직, 필요시 부를 때 가는)이니 아니면 관두면 되지,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드디어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내가 근무를 시작한 종합병원은 12개의 수술방이 있고 다양한 과의 다양한 수술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보통은 거의 매일 정해 진 전문 과나 의사가 있어서 예상 가능한 일들을 수행하지만 가끔 다른 수술이나 의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정형외과와 척추 수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사실 지원 전에 얼핏 보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프리셉터는 미국의 중년의 남자 간호사였다. 그는 딱히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사무적인 말투에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유능한 간호사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을 만큼 내가 귀찮았는지도.

종합병원은 훨씬 복잡한 시스템으로 모든 약들과 수술용품들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 하나라도 까먹는 날엔 달려가  여러 번의 코드를 풀고 가져와야 했다. 촌각을 다투는 수술에 긴장을 놓지 않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환자들의 상태가 훨씬 심각하는 것이었다. 수술 전에 이미 건강 상태가 심각할 뿐만 아니라, 수술 후에도 중환자실을 가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 가지만 걱정했다. 

'급박한 환자가 생겼을 경우 만약에 내가 의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지만 늘 그렇듯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미 다른 질환을 가진 중증의 환자가 무사히 경추 수술을 잘 받고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갓 2주 정도의 오리엔테이션 끝에 나는 혼자 수술에 임하고 있었고 나름 잘 준비된 수술에 만족할 때쯤 마취과 의사가 나를 불렀다. 나에게 회복실에 가는 동안 산소를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이미 준비를 마쳤다고 뿌듯해하며 대답을 주었다. 환자를 회복실에 데리고 나와서야 나는 내가 그 의사의 말을 잘 못 이해했음을 알았다. 그 의사는 나에게 respiratory therapist를 대기시켜 ventilator를 회복실에서 연결해서 바로 중환자실로 환자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호흡기사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 기사가 ventilator를 가져올 수 았다는 것도 몰랐다. 그 의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짜증을 내며 환자의 ambu bag를 잡고 호흡기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수술실의 charge간호사, 회복실의 charge 간호사가 차례로 와서 의사에게 사과를 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15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누군가는 실수를 잊기도 하고 실수를 통해 성장도 한다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의 실수가 창피했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이 무서웠다. 영어도 어설프지만 병원에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일들을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응급상황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존심에 금이 갔으며 그것을 떨고 일어날 만큼 나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이제 겨우 미국에 온 지 3년, 간호사일을 시작한 지 1년 반 밖에 안된 나는 뼈아프게 현실에 직면한 것이었다. 

'나의 최고 능력치가 이것밖에 안 된다면, 그래 여기서 접자. 받아들이자.'




아무도 나를 책하는 사람도 없었고 환자는 무사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쯤이야 다들 잊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고 아니 다 잊어버리고 그곳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그래, 어떻게든 나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전을 위해 성장을 위해 이곳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었고 이제 3살이 된 아들과 더 많이 함께 하고 싶었다. 나의 이민의 목적을 다시 새겨보았다. 

무엇이 소중한가? 

무엇이 나의 일순위인가?

나는 스트레스 없이 적당한 월급에 가족과 행복하고 싶었다. 매일의 전쟁 같은 직장 생활은 이미 한국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나는 2주 notice를 주고 종합병원을 나왔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했지만 살아남을 것이다. 최고가 아닌 최선의 선택으로.

다행히도 outpatient surgery center는 때마침 나에게 full time를 제안했고 나는 나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나에게 full time제안을 해준 surgery center에 감사했고, 다시 종합병원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outpatietent surgery center에서 10년 넘도록 일하고 있으며 나는 살아남았다. 아직도 서툰 영어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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