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를 받는 직업 중에 하나로 간호사가 뽑힌다.
미국에서 간호사의 사회적 위치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기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며 희생을 하는 직업군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이것은 간호사들에게는 자부심이자 그만큼의 윤리의식을 사회로부터 요구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이제 막 처음 미국에서 간호사 일을 시작한 나는, 명예나 희생정신과는 멀기만 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한 surgery center는 보통 7시에 수술이 시작된다. 나는 그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하루를 준비했다. 하루 종일 같은 수술방에서 같은 의사와 같은 surgical technician과 하루를 보내니 서로 친해져야만 하는,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들은 낯선 나의 억양에 어색한 미소로 답을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나의 말을 알아들었을 때와 알아듣지 못했을 때의 표정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고(물론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말로 해걸 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눈치껏 몸으로 때우고 있었다.
나중에 우스갯소리로 같은 간호사들끼리 만나
"말이 안 되니 몸이 고생이다"라며 웃었다.
영어는 나에게만 어려운 것은 아닌 듯하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orientation으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동료 간호사 중 한 명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기본적인 것들을 배워나갔다. 나의 첫 preceptor의 이름은 Janet이었다. 우리는 두 명의 Janet이 있었고 뒤의 성을 붙여 Janet B라고 불렀다. Janet B는 말은 조금 많지만, 최근에 산 Audi에 기뻐하며, 10대 두 딸 때문에 걱정이 끊일새 없는 전형적인 워킹 맘이자 내가 이곳을 떠날 때 나보다 더 많이 울어 준, 정 많은 40대 후반의 아줌마 간호사였다.
나는 어떻게 하루를 시작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지를 Janet를 통해 배워나갔다.
각각의 수술에 따른 준비할 것들과 의사 개개인의 성향과 취향에 맞는 준비상황을 배워가며, 모든 것을 한글과 영어를 섞어 하나하나 메모해 나갔다.
나중에 그 메모를 다시 꺼내보니 너무 사소한 것까지 적혀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그 꼼꼼한 메모 덕에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미리 준비할 수 있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일을 곧 잘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한국에서 받은 혹독한 training과 한국인 특유의 빠른 눈치 때문이기도 하니, 나를 혼내며 가르쳐 주었던 선배 간호사 선생님에게도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는 다르지만 같은 일주일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4시간마다 15분의 휴식시간, 6시간마다 30분의 점심시간이 주어진다. 한국의 빡빡한 스케줄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15분이 처음엔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걸 같은 촉박함으로 휴식 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나를 누구는 안쓰럽게 누구는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점심시간은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30분 동안 항상 시간이 남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뿐 아니라 밥 먹는 사이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왜들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많은 거야?'
나는 영어로 나누는 사소한 스몰 토크가 낯설어 가끔은 차에 나가 점심을 먹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점심시간은 법적으로 보장되었을 뿐 아니라, pay도 받지 않으니 맘 편히 쉬어도 되는 것이다.
'밥 먹는 것도 돈을 빼다니 이런 독한 놈들.'
하지만 새로운 직장으로 나는 제대로 된 tax를 내며 미국의 한 시민으로 기여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쯤이면 작은 성공 이라며 새로운 삶에 감사하고 았었다.
하지만 멀지 않아...
나는 익숙해진 이곳 캘리포니아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떠나게 되니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른 채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낯선 땅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