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정유정)』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정유정이라는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생각의 그 아래 어딘가 있는 그것을 글로 잘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최근 유튜브에서 종종 찾아보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정유정 작가가 나온 것을 보게 되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정유정의 '악의 3부작'이라고 불리는 '7년의 밤', '종의 기원', '28'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년의 밤』을 소설 이후 영화까지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어 읽어 보지 못했던 '종의 기원'과 '28'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자신의 '악의 3부작'을 설명하시면서 '7년의 밤'이나 '28'에도 '사이코패스'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종의 기원'은 그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쓰인 소설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았다.
저 앞 흐릿한 안갯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책은 이렇게 끝이 난다. 소설이 끝나고 난 뒤 덧붙여지는 '작가의 말'을 잘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도저히 이렇게 책을 덮을 수 없었다. 나의 그 마음을 알았을까. 내가 작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첫 장에 쓰여있었다. 왜 그토록 인간의 '악'에 집착하는지. 그 질문에 대해서 작가는 자신이 어떻게 '악인'의 '악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는지 이야기한다. 사람,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
작가는 '종의 기원'의 책의 모티브가 된 살인자 '박한상'에 대해 이렇게 질문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작가는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있는 '악'이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한 문장 한 문장 책으로 엮어내었다. 그리고 작가가 그렇게 엮어낸 문장을 읽으며 가끔은 장난스럽게도 사용해왔던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더욱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생각에 놀랄 때도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문장에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나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가의 말' 첫 문장에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종의 기원으로 발간된 책은 영문판으로 발간되면서 'The Good Son'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두 제목 모두 작가의 의도와 이 소설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영문 제목에 조금 더 주목을 해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부분이 '존속 살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피를 나눈 사이인 부모를 살해한다는 것이 인간의 악의 끝을 잘 보여준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일어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소름 끼쳤다.
또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최소한 어머니의 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으나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눈은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너는 날 묻어버리는 일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니? 내가 죽었는데 아무 느낌도 없니? 갓 내린 커피를 엎지른 것과 다르다는 걸 정말 모르겠니?'
알아요, 아다마다요. 너무 잘 알아서 미칠 지경이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요.
우리는 어쩌면 '사이코패스'라는 존재를 감정이 없는 어떠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살해하고,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는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머니를 보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입을 빌려 내가 죽었는데 아무 느낌도 없느냐고 되묻는 주인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안다고 알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한참을 머물렀다.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종이 다른 사람과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느껴야 하는 수만 가지의 감정 중 그 어느 부분이 결여되면 이렇게 '악'이 그 깊숙한 곳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구나. 그 감정 속에 오롯이 '나'만을 가져다 놓는다면 두려움, 걱정, 공포 등의 감정은 남지만 어머니를 살해하는 행위가 마치 커피를 엎지는 것과 같아지게 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 무서운 감정의 결여는 아래 부분에서 더 소름 끼치게 나타난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것이 전략적으로 구사한 첫 "안녕히 주무세요"였다. 이후 일회용 반창고처럼 써먹었다. 어머니를 진정시켜야 할 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대사 대용으로 어머니의 간섭을 미리 차단하는 가림막으로, 그 밖의 오만 가지 도구로, 어쩌면 어젯밤에도 그랬는지 모른다. 내가 볼일 좀 보고 와서 처리해드릴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하는 의미로.
자신이 죽인 어머니의 시체를 보며 자신이 벌일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안녕히 주무세요"를 외치며 돌아선 아들. 그리고 그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어머니를 진정시키려 할 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 등과 같은 일과 같은 행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어머니를 살해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죽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내가 볼일 좀 보고 와서 처리해 드릴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라고 말한다.
이것이 인간의 악이 드러난 모습일까. 그리고 이름조차 담고 싶지 않은 세상의 '살인자', '사이코패스'들이 이러한 '악인'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날수록 더욱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