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Park Jan 06. 2022

고전을 읽으며 올해를 살아가는 방향성 세우기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

니스의 겨울 바다 앞에서 <데미안>을 처음 폈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겨울 바다와 안 어울리는 싱클레어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한순간 '나는 내일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보다, 내 앞길이 점점 내리막이다가 끝내 암흑으로 빠질 거라는 끔찍한 확신에 몸이 떨렸다. 나는 절실히 느꼈다. 이번 잘못이 자꾸 다른 잘못으로 이어질 거라고. 그래서 누나들과 다정히 지내고 부모님께 인사하고 입맞춤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 되고, 나는 나만 아는 은밀한 거짓 속에서 살게 될 거라고. 

악과 선이 공존하는 그 경계 어느 지점에서 두 개의 세계를 바라보던 싱클레어는 악의 세계에 빠진 자신을 보며 다시는 선의 세계에는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의 묘사가 앞에 펼쳐진 눈부신 겨울바다와 대조되면서 나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래서 였을까, 그 처절한 묘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나 스스로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에 있는 내 마음을 읽어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니스 바닷가 (출처 본인)


그러한 기분은 책의 중반 싱클레어의 방탕한 생활 한가운데서 다시 튀어나왔다. 

나는 나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 가면서, 때때로 상황을 이런 식으로 파악했다. 만약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더 좋은 자리와 가치 있는 일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야 자멸해 버리면 그만이고, 손해야 세상이 보겠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언젠가 한번 '그래, 이렇게 온 우주가 나를 힘들게 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우주의 손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내가 떠올랐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녔구나 하는 안도의 생각과 그러한 마음이 이렇게 글로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이렇게 사람들이 머릿속에 한 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생각들을 한 문장에 담아 표현했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공감받는 것이 아닐까.


#데미안이라는 존재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에게 다가온 데미안은 무엇이든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나눌 수는 없다. 싱크 레어가 겪어왔던 것처럼 선과 악은 그 경계가 모호하게 섞여있을 때가 더 많다. 그렇기에 조금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악이 될 때도 많이 있다. 그렇기에 자신 만의 기준과 생각하는 습관은 지금 우리의 삶에도 필요한 것 같다. 


헤르만 헤세 (출처 https://m.blog.daum.net/irepublic/7889468)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살아가는 세계는 세계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싱크레어와 데미안이 청년이 되어 전쟁 한복판에 나가는 장면이 펼쳐지면서 싱크레어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 헤르만 헤세가 가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 법칙이 오늘날 더 이상 맞지 않구나, 법들이 다 낡아버렸는데 종교나 도덕도 적당하지가 않는구나'하고 느끼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만 하고 공장만 세웠거든! 한 사람을 죽이는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지만 신에게 기도하는 법은, 단 한 시간만이라도 행복해질 방법은 전혀 모르는 거야.


싱클레어의 인생에 데미안과 같이 깨어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는 인물이 있었기에 싱클레어도 계속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는 유럽의 모습이 그리고 그 이면에 드리웠던 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아브락사스


싱클레어의 인생에는 데미안만큼이나 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한 명이 오르간 소리로 만난 피스토리우스이다.

자네는 스스로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돼!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서도 안 돼. 자연이 자넬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네. 자넨 번번이 자신이 별난 사람이 되고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책하는데, 그런 생각을 버려. 불을 들여다 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하고, 그러다가 내면의 소리가 들리거든 즉시 그것들에 자신을 내맡기게. 처음부터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신의 뜻과 일치하는지, 그들의 마음에 들지를 묻지는 말라고! 그런 물음이 사람을 망쳐. 그렇게 하면 안전하게 인도로만 걷는 화석이 되고 마는 거야.

아브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인 존재로 표현된다.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문장에서 등장한다. 신과 악마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하는데 그 두 가지를 하나의 이름으로 묶는다는 것이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문장을 그리고 아브락사스를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피스토리우스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위의 이야기에 이어서 '아브락사스는 어떤 생각도, 어떤 꿈도 제외하지 않아.'라고 한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아브락사스는 싱크레어가 인생 전체를 통해 고민했던 선과 악이 뒤섞여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스스로 내린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지금의 나에게도 조금의 힌트를 주었다. 신이라는 존재가 나를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 선생님이나 아버지의 뜻과 마음에 드는지 묻는 물음이 아닌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온 책인 만큼 등장인물과 그 안의 것들에 대한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하지만,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읽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가 어떠한 마음으로 의도로 글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다가온 데미안은 위에 글과 같은 느낌이었다. 


2022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올해에는 무엇을 이루어야지라고 새웠던 계획보다는 올해는 조금 다른 계획을 가졌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이 아닌, 내 마음속의 진정한 행복을 찾고 누리는 한 해를 보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복을 통해 채워진 에너지를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사람들에게 흠뻑 쏟는 해가 되는 것. 20대의 끝자락의 한해를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하며 채워가며 보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매너리즘 속의 새로움을 발견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