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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숙 Jun 13. 2024

우연히 본 새에 관하여

우연히 본 새에 관하여      

   

 

긴 칼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그는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가 절뚝일 때마다 더 기우뚱거리는 그림자 

그는 조용하고 인내심 많은 사람 같았다      


그에게도 기억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더 이상 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될 계절이 오면 

마른 도토리 하나 땅에 묻듯 

그리할 거라 만지작거렸을 

     

담벼락 아래 버려진 물건들은 뒤집힌 채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물크러진 어둠 속 

마지막까지 사건을 기억하는 건 모두 그들의 몫이라 

침묵은 저토록 집요한 걸까    

  

처음으로 산사나무를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잎 다진 가지마다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열매가 

좀 작은 꽃사과 같기도 하고 조금 큰 앵두 같기도 하고 

그때 네가 그랬다 비슷한 건 가짜야 

산사나무는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될 거라고 

가지마다 흰 꽃이 필 거라고 

누군가는 그 꽃을 볼 수 있겠지 

산사나무 열매는 다만 붉은 듯 동그란 듯 

나는 아무래도 너와 내가 꽃사과거나 앵두 같기만 하고 

     

골목 끝자락쯤에서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산사나무에 붉은 꽃 핀대도 나는 되돌아갈 수 없고 

긴 기다림이야말로 나의 진짜 재능일 테고 

언젠가 일격의 순간 순식간에 

저 긴 칼은 고요히 허공을 가를 것이다 

비겁하게 뒤에서가 아니라 내 앞에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며    

  

꾸러미처럼 웅크려 앉은 근심 많은 이마를 지나 

그는 사람들 사이로 어느새 사라졌다 

거리의 상점 불빛을 통과하는 얼굴들은 

텅 비어 있거나 무언가로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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