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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Apr 01. 2024

사랑은 어떤 맛일까?

ㅡ 슬픈 머리핀

   @ 사랑은 어떤 맛일까? - 슬픈 머리핀

 

(* <감정의 맛, 여덟 가지> - 예전에 썼던 글인데요. 지난번에 이어 두번째 '슬픈 머리핀' 편입니다. 단편소설보다는 짧지만 일반 글보다는 길어요. 보실 분들만 보시고 나머지는 패스하시길요~^^)


  나는 서울의 어느 지하철 역

  가판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가판대 위에는 나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다른 머리핀 친구들과 팔찌, 귀걸이 등

  다양한 매력을 지닌 장신구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나 예쁘지?’ 하고 미모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역 직원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애써 후미진 귀퉁이에 자리를 잡은 까닭에

  조명이 다소 흐렸다.

  그렇지만 까무스름한 내 몸뚱이에는

  큐빅이 5개나 박혀 있어서

  흐릿한 조명 아래서도 광채가 빛났다.  


  남자 하나가 스윽 곁눈질로 훑어보며 우리 곁을 지나쳤다.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보아 퇴근길인 듯했다.

  수없이 지나는 행인 중에 유독 그가 눈에 띈 것은

  왼쪽 귀밑 부근의 거무스름한 반점 때문이었다.

  거의 어른 주먹만한 크기라 눈에 금방 띄었다.

  저 정도면 어린 시절 점박이라고 놀림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가던 그가 멈칫멈칫하더니

  걸음을 되돌려 가판대 앞에 섰다.

  그는 가판대 위를 훑어보면서

  무의식 중에 한손으로 귀밑 부근을 가렸다.

  누가 그의 선택을 받을까?  괜시리 마음이 설레였다.

  나와 친구들은 자신이 더 예쁘고 매력적이라며

  그 자태를 과시했다.


  남자는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곧장 머리핀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의 시선이 곤충의 더듬이처럼

  나와 친구들 머리 위를 스멀스멀 옮겨다녔다.

  “머리핀을 고르시나 봐요?”

  남자는 대답 대신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있는 친구를 집어들었다.

  “잘 고르셨네요.  그거 요즘 멋쟁이 아가씨들한테 인기 많거든요.”

  남자는 들은 체 만 체 머리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나를 집어올렸다.

  판매상이 또 호들갑스레 말을 이었다.

  “아, 그건 빈티지 스타일의 여성에게 잘 어울리죠.  고상한 멋을 풍기거든요.”

  남자는 요모조모 살피더니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

  다른 친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역의 단속 직원이 다가오며 외쳤다.

  “어이, 안돼요.  빨리 접으세요.  여기서 이런 거 파시면 안됩니다!”

  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값을 치르고 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여자들이 쓰는 물건을 남자가 샀으니

  필시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이 틀림없었다.

  진짜 내 주인은 누가 될까?  

  이 남자가 결혼을 했다면 어린 딸이나 아내일 테고,

  아직 혼자라면 귀여운 조카나 애인이 되지 않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남자는 예쁜 포장지를 사서 정성껏 나를 감쌌다.

  포장 속에는 편지도 함께 넣었다.


  안녕, 선희야?

  너를 안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네.

  처음 네가 우리 동호회 작업실에 오던 날을

  난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

  쭈뼛쭈뼛 문을 열고 들어와 말없이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림 그리던 모습, 그 뒷모습... .

  사람은 입으로만 말한다고 생각지 않아.

  이마는 주름으로 말을 하고,

  손은 손금으로 말을 하고,

  어깨는 기울기로 말을 하지.

  너의 뒷모습은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듯했어.

  그래서 가끔씩 너의 뒷모습을 슬쩍슬쩍 훔쳐보곤 했지.

  머리태가 참 곱다는 느낌이었어.

  그 흔한 머리핀이 없는 건지

  늘 노랑 고무줄로 뒷머리를 쫑긋 묶고 조용히 붓질을 하던 모습.

  왠지 나를 닮은 여자라고 혼자 생각했어.

  그래서일까, 어느 날부터 그 머리태가 애잔해지기 시작하더라구.

  나도 모르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 우연히 퇴근길에 선물 하나 샀어.

  선물이라기엔 너무 약소하지.  

  길거리 가판대에서 파는 싸구려 머리핀이거든.

  다급하게 고르느라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판매상 왈, 빈티지 스타일의 고상한 멋을 풍기는

  여자에게 잘 어울리는 제품이래... 큭큭!

  꽤나 수다스러운 사람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있겠냐마는

  이왕 산 것이니 기쁘게 받아주길 바래.

  별뜻은 없어.  부담가질 필요도 없고.

  그냥 주고 싶었을 뿐이야.

  아무래도 노랑 고무줄보단 이 머리핀이 더 나을 테니까.  

  그럼, 이만 총총... !


  나는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편지를 받을 주인공은 어떤 여자일까?

  정말 나를 고맙게 받아줄까?  퇴짜를 맞으면 어떡하지?

  여자와의 만남을 앞두고 긴장과 기대가 묘하게 교차했다.


  남자가 두툼한 외투 주머니에 나를 넣었다.

  곧 임자를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이제나 저제나 애가 탔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은 임자를 찾아가지 못한 채

  남자의 주머니 속에 머물다 되돌아왔다.

  종일 손 안에서 조몰락거리기만 할 뿐

  여자에게 건너가지 못했다.


  다음번을 기대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번의 기대도 그렇게 무너졌다.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를 만지작거리다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러기를 여러 번... .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용기가 부족하거나 손이 부끄러워 선뜻 건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마음을 틀키고 싶지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나를 건네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딱 한번 이런 적이 있긴 했다.

  여자가 이젤 앞에 앉아 화사한 목련을 그리고 있을 때

남자가 다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어, 목련꽃을 좋아하나봐?”

  “네... .”

  여자는 한 호흡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정원 있는 집에서 살면 꼭 한 그루 심고 싶어요.”

  “음... .”

  남자도 한 호흡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림이 참 단아한 느낌이네.”

  “아, 그래요?  꽃이 단아하니 그림도... 호호!”

  남자는 따라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머리는 왜 맨날 노랑고무줄로 묶고 다녀?”

  “그냥요.  이게 편해서요.  실은 직장에서 이 고무줄 많이 쓰거든요.”

  “무슨 일 하는데... ?”

  “컴퓨터 부품 취급하는 일이요.”

  “컴퓨터 부품 취급하는 데 왜 고무줄이... ?”

  여자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아이, 그런 게 있어요.  자세히 모르셔도 돼요.”

  남자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습관적으로 왼쪽 귀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 저 생일이 언제...?”

  남자가 너무 작게 말해서 못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너무 뜽금없는 질문이라 그랬는지

  여자가 ‘네?’ 하고 남자를 휙 돌아봤다.

  “아... 아니, 그냥 그림 그리라구!”   

  남자는 무엇을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 후로 나는 어두운 시간 속에 갇혀버렸다.

  남자는 나를 잊어버린 듯했다.

  암흑의 시간 속에서 나도 나를 잊어버렸다.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그로부터 2년쯤 지난 뒤였다.

  남자가 서랍에서 나를 찾아 손에 쥐었을 때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책상 서랍 속에 들어가

  캄캄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행히 남자는 예전의 편지를 빼내고,

  그 대신 메모지 한 장을 새로 끼워넣었다.

  내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자와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선희야, 지난번 우리 만났을 때 있잖아.

  산책 삼아 와룡산 기슭을 거닐 때

  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달,

  소나무 사이에 걸린 초저녁 밤하늘의 달!  

  왠지 푸르다고 느끼는 그 밤의 기억이

  무슨 은은한 향기처럼 오래도록 마음 속에 고여있는 느낌이야.

  그 푸른 밤도 신비로웠지만 그보다 더 내 기억 속에

  신비로웠던 건 달에 취한 듯 하염없이 바라보던 너!  

  너의 뒷모습을 슬쩍 곁눈질하다가 문득 이 머리핀이 생각났어.  

  서랍 속에 묵혀둔 머리핀을 꺼내 살펴보니 여전히 쓸만해.

  이제라도 임자에게 돌려줘야겠어.

  얼마 전에 네 생일도 지났잖아.

  그걸 어찌 알았냐고?  그건 비밀... 큭!


  남자가 여자를 만난 곳은 연극 공연장이었다.

  조명이 꺼지고 웬 대머리 사내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군바리 톤으로 ‘기상’을 외치며 연극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삼남매의 가장인 대머리 사내의 둘째딸 미숙이!

  엄격하고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를 뚫고 이루어지는

  둘째딸 미숙이의 발칙하고 도발적인 연애 스토리였다.


  처음에 나는 좀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겨우 밝은 세상으로 나왔는데 다시 어두컴컴한

  극장 객석에 들어와 있으니 갑갑증이 일기도 했다.  

  더구나 ‘재미와 감동을 주는 로맨스’라니...!

  이런 상투적인 홍보 문구가 들어간 연극치고

  제대로 된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경우는

  가뭄에 콩나기처럼 드문 일 아닌가!


  하지만 시큰둥하게 있던 나를 조롱이라도 하듯

  2시간의 공연 시간이 입안의 솜사탕처럼 스스르 녹아 없어져버렸다.

  전혀 지루할 틈도 없이 블랙홀처럼 객석을 빨아들였다.

  좀 이상한 것은 남자였다.

  왠일인지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고

  주인공 여배우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눈치였다.

  자신이 마치 무대 감독이라도 되는 양

  여배우의 대사와 몸짓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 그러고 보니 극장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예쁘장한 사진 속 주인공 여배우를

  애정어린 눈길로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수상쩍긴 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관객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연극이 막을 내린 뒤에도 남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여자는 이미 극장 입구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출연진과 관객의 포토타임이 끝나자

  주인공 여배우가 객석에 앉은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삼촌!  오늘 연극 어땠어?”

  “너무 좋았어.  혹여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였는데 아주 완벽해.  관객들 반응도 좋고... .

  “아, 다행이다.  근데 삼촌 왜 또 왔어?  지난번에 봤잖아!”

  “쉿!  작게 말해... .”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재미있어서... 또 보고 싶어서 온 거지.”

  “에이, 저기 서 있는 언니 누구야?  여자친구...?  애인... ?”

  “애인은 무슨... 아니야!”

  남자는 크게 손사래를 쳤다.

  “히히, 아니긴... 인사 좀 시켜주든가?”   

  “아이 참, 아니라니깐... 나 먼저 갈게!”

  남자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여자와 저녁을 먹고

  작은 쪽창이 달린 술집에 마주 앉았다.

  “찻집으로 갈 걸... 괜히 여기로 왔네.”

  “아니에요.  술은 못 마셔도 술 마시는 분위기는 즐길 수 있으니 괜찮아요.”

  “전에 몸이 좀 안 좋다더니 여전히 그런가 보네.”

  “네, 조금... .  차차 좋아지겠죠.  

  나중에 좋아지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요.

  제가 한잔 살게요... 호호.”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몸이 예전보다 조금 야윈 듯했다.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얼마 전에 너 생일 지났지?”

  “네에... ?”

  여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왼쪽 귀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직도 그 습관은 여전한 듯했다.

  “놀라긴... 지난번에 작업실 갔다가

  우연히 네가 입회원서 쓴 걸 봤어.  거기 생일 적는 난이 있잖아!”

  “아... 그거요?  그건 서류상의 생일을 적은 거죠.

  실제로는 달라요.  우리 아버지가 호적 신고를 잘못 했거든요.”

  “아, 그럼 실제로는... ?”

  “서너달 후쯤이요.  근데 그건 왜 물어봐요?

  선물 주려구요?  준다면 받아야죠... 호호.”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깊이 새겨두려는 듯 날짜를 되뇌였다.

  “근데 요즘 왜 화실에 안 나오냐?  

  직장일이 많이 바쁜가?  아님 몸이 좀 안 좋아서... ?”

  “둘 다요.  몸도 마음도 고단하고...

  조만간 직장을 좀 쉴까 봐요.  그 땐 나갈지 몰라요.”

  남자가 잔을 비우자 여자가 채워주었다.

  “좋은 작품 많이 그리셨어요?”

  “아니, 요즘엔 나도 잘 안 나가.  지난번엔 오랜만에 간 거야.

  그래서 그림 안 그리고 빈둥거리다 우연히 네 서류 본 거고.”

  “왜 잘 안 나가요?”

  “글세, 그냥... 네가 안 나오니까 나도 나가기 싫더라구.”

  남자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귀밑의 반점 색깔도 더 짙어졌다.

  “호호, 무슨 말을... 그냥 웃지요.”

  “그래, 웃어.  웃으라고 한 얘기니까... .”

  남자는 열적은 듯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여자도 쪽창 너머

  차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넘겨다보았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또 다시

  남자의 서랍 속에 들어가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하다니... !

  어정쩡하고 우유부단한 남자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임자를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낡아지다 보면 끝내는 폐품이 되어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었다.

  그래도 여자의 생일날이 그리 멀지 않으니

  그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 그런데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임자를 만나게 되는 날이 생각보다 일찍 왔다.

  이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남자가 새로 끼워넣은 편지의 사연을 보면

  둘은 짧은 사이에 이미 연인관계로 맺어진 듯했다.


  나의 사랑, 선희야!

  처음 네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어.

  병원으로 가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지.

  환자복을 입은 채 핼쑥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너를 본 순간

  발밑의 땅이 꺼지듯 눈앞이 아찔했어.

  하지만 여전히 밝은 네 표정,

  잘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소 마음이 놓이긴 했지.

  한번만 병문안을 가는 것은

  너무 형식적인 것 같아 두 번째 병문안을 가고,

  두 번만 가는 것은 왠지 정이 없는 것 같아

  세 번째 병문안을 가고,

  세 번만 가는 것은 우리 사이가 딱 여기까지 머물 것 같아

  네 번째 병문안을 가고,

  이후로는 무턱대고 가고 싶어서,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렇게 다니길 한 달여!

  퇴근 후에 병원으로 가는 게 자연스런 일과가 되고,

  굳이 얼토당토 않은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어버린

  지금이 나는 너무 좋아.

  머리핀을 산 이후 꼭꼭 감추고 있던 내 마음을

  이제 모두 들켜버렸으니

  제 임자를 찾아줘도 손이 부끄럽지 않겠어.

  이건 단지 그냥 머리핀이 아니라

  알을 품은 새처럼 오래도록 간직했던 내 마음이야.

  받아주길 바래!


  나는 기분이 들떴다.

  여자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 것이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걸 계기로 남자가 속마음을 드러내고 연인으로 발전하여

  드디어 나도 임자를 찾아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남자 역시 여자가 아픈 것을 무척 애달파하면서도

  병원에 있어서 항상 보고 싶을 때 오면 볼 수 있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오늘은 그녀가 화실에 올까?  혹은 연락하면 만나줄까?

  그런 걱정 없이 병원에 가면 항상 병실에서  

  남자를 반가운 미소로 맞이해주는 이 상황이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여자의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겨 존재감을 빛내게 되었다.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매만지며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곤 했다.

  세상에 나온 뒤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곁에서 지켜본 여자와 남자의 연애는 아주 특별했다.

  여자는 늘 병실에서 남자를 기다렸고,

  남자는 자신을 기다려주는 여자가 너무 고마워

  좀 더 빨리 퇴근하고 좀 더 병실에 오래 있다 가려고 애썼다.

  남자가 병실에 찾아오면 여자는 어두웠던 표정이 밝아지며

  하루 종일 아팠던 몸이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아프지 않은 듯 보였다.

  그들은 병실이나 진료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연인들이 보기에는 재미없고 지루해 보이는 만남일 수 있지만

  그들은 세상의 어떤 연인들보다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다가왔다.  여자의 생일!

  프로포즈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6인용 병실에서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던 인기 연속극이 방영되어

  모든 병실 사람들이 TV를 보고 있던 그 시간에

  남자는 여자에게 장미꽃 한다발을 바치며 청혼을 했다.

  “선희씨, 병이 다 나아 퇴원을 한 후 우리 같이 살아요!”

  청혼을 받은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집 모양을 그렸다.

  “우리 이렇게 이쁜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요!”

  해맑게 웃던 여자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남자가 여자를 이끌고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봄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 한켠을 장식한 나를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예쁘네.  아주 잘 어울려!”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창문을 열자 그윽한 목련향이 병실에 스며들었다.

  그 향기에 취한 듯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왼쪽 귀밑에 아주 진한 입맞춤을 했다.


  여자는 남자의 분신이라도 되는 양 나를 아겼다.

  얼마나 애착이 심한지 잠을 잘 때조차 나를 풀어놓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한바탕 작은 소동이 일었다.

  어느 날 아침 머리를 매만지며

  나를 살피던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5개의 큐빅 중 하나가 빠져버린 것이다.

  병실의 침대와 이불 바닥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울상이 된 여자는 하루 종일 침울했다.

  이튿날 남자는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큐빅 알갱이 몇 개를 가지고 왔다.

  이것 저것 끼워보았으나 정확히 맞는 것은 없었다.

  남자는 스스로 자책하듯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가판대에서 산 싸구려라서 그래.  

  나중 퇴원하면 더 좋은 걸로 얼마든지 사줄게!”

  “그래도 나는 이게 더 좋은걸요!”

  여자는 이빨 하나가 빠져버린 나를

  한동안 넋나간 눈빛으로 바라보다 혼잣말인 듯 내뱉었다.

  “치잇, 괜찮아!  뭐 어때, 어차피 치료가 시작되면

  머리카락도 다 빠질 텐데... 이깟 머리핀이 무슨 소용이람!”


  그 날의 상심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사태가 뜻하지 않게 전개되었다.

  늘 퇴근시간에 단정한 양복차림이던 남자가

  이른 아침 추레한 차림새로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왔다.

  여자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여자는 이미 수술실로 옮겨간 뒤였다.

  초조하고 긴장된 얼굴로 서성이길 두어시간,

  수술실에서 나온 앳된 간호사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환자 보호자 되시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 여기 머리핀... 환자 소지품이에요!” 하고는

  여자의 머리에서 풀어낸 나를 건넸다.

  남자가 몇 마디 질문을 던졌으나 간호사는 대답을 피했다.

  “수술 시간이 오래 걸려요.  병실에 가서 기다리시죠.”

  남자는 얼마간 더 그 앞에서 서성이다 병실로 돌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그는 주머니 속의 나를 꼭 쥐었다.

  손에서 배어나온 땀이 내 몸을 흥건히 적셨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 주머니 속을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때쯤

  아까 그 간호사가 찾아왔다.

  “환자분 중환자실로 옮겼어요.

   당분간 거기서 치료 받아야 할 테니

   여기 병실의 짐들은 정리해주세요.”

  “그럼, 그쪽으로 옮기면 되나요?”

  “아뇨, 거긴 보호자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

  면회도 하루 한 차례만으로 제한될 거예요.”

  남자의 망연자실한 얼굴은 보지 않아도 보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기어이 올 것은 오고, 떠날 것은 떠난다.

  다시 여자를 만난 것은 병원 영안실이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주머니 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생기를 잃은 여자의 머리카락에 정성 들여 꽂아주었다.

  화장장으로 옮겨가 한 줌의 재가 되는 데는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 어렵게 피어난 꽃이

  잠깐 사이에 지고 말듯이

  여자의 일생이나

  여자를 따라 피고 진 내 일생이나

  어느 산야에 뿌려질지 알 수 없지만

  돌이켜보면 서러운 것도 아니고,

  서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 남은 남자의 서러움이

  건들거리는 바람에 실려가

  우수수 꽃잎처럼 흩날리던 그 날은

  햇살조차 환장하게 좋은 봄날이었다.

  꽃잎을 따라 짧은 봄날이 저물고 있었다.



   -------< 끝 >----------


수묵담채화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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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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